쟁점:운동 내 이슈들

오늘날의 학생운동

정병호 23 29
140

올해 상반기는 모처럼 대학생들의 투쟁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은 시기였다. 동국대·경희대·고려대·서강대·이화여대·인하대 등 여러 대학에서 등록금 인상에 반대해 1천~3천 명이 참가하는 학생총회가 열렸다. 이런 최근의 대학가 분위기를 두고 <한겨레>는 “2000년대 들어 급격히 위축됐던 대학의 집회문화가 최근 들어 등록금 인상을 계기로 눈에 띄게 되살아나는 모양새다” 하고 보도하기도 했다.[1]

학생총회가 올해 투쟁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2000년대 동안 여러 대학에서 학생총회가 성사됐다. 학생총회와 관련해, 올해 투쟁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서울의 여러 대학들에서 등록금 인상에 반대해 몇 년 만에 학생총회가 성사됐고, 학생총회 이후에도 투쟁이 지속됐다는 점일 것이다. 이화여대 학생들은 일주일 동안 채플 거부 투쟁을 벌였고, 고려대와 인하대 학생들은 학생총회에서 점거 농성을 결의하고 투쟁에 돌입했다. 이런 투쟁의 압력 때문에 학교 당국들은 장학금 확충이나 학사 경쟁 완화 등(학생들의 성에 차지 않는) 양보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5월 하순의 시점에서 이들 대학의 투쟁은 대체로 더 지속되지 못하고, 등록금 인상을 철회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은 학생운동이 처한 현주소를 보여 주는 듯하다. 즉, 올해 학생들의 투쟁이 잠재력을 힐끗 보여 줬지만, 다른 한편 약점도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오늘날의 한국 학생운동이 어떤 변화 과정을 겪으며,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1990년대 말의 변화

한국은 전통적으로 학생운동이 강력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한국의 학생운동은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투쟁을 이끌었다. 비록 당시 투쟁이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투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투쟁을 이끌 잠재력을 가진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촉발하는 데서 학생운동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런데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동안 학생운동은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고, 마땅히 기대되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학생운동에 대한 성마르고 일면적인 폄하가 횡행했다. 보수 언론들은 취직 경쟁이나 스펙 경쟁에 몰두하는 것이 요즘 젊은 세대의 대세라는 식으로 개인주의를 은근히 부추겼다.[2] 반대로 개혁주의 언론이나 지식인들은 학생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질타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촛불 항쟁 때 20대가 제 구실을 못한다는 비난이 많았다.[3] 비록 공식 학생회 깃발 아래 모이지는 않았지만, 2002년이나 2004년 그리고 2008년 촛불 항쟁에서 대학생 참가가 적잖았는데도 말이다.

물론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과 견주면 1990년대 말 이후 학생운동은 조직화 정도나 전투성 면에서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이런 변화는 1997년 IMF 공황 전후로 노동시장 경쟁이 강화되고 대학의 학사 과정에서 경쟁을 강화하는 조처들이 도입된 것과 관계 있다. 학생들은 전보다 더 심하게 학점 경쟁, 스펙 경쟁의 압력을 받았고, 이 때문에 개인주의도 강화돼 정치 조직, 학생회, 동아리 등 전통적 학생운동의 조직들에 참여하는 학생 수가 많이 줄어들게 됐다.

물론 이것이 경제 위기에 따른 자동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경제 위기 직전에 학생 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졌고(1995년 전두환·노태우 구속 투쟁, 1996년 등록금과 반정부 투쟁 등), 엄청난 탄압을 받았지만 그 여파가 1996년 말부터 1997년 초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의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처리에 항의하는 민주노총 노동자들의 대중파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과 같은 수준의 급진화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소련·동유럽 블록 몰락 이후 그 전까지 이 체제들을 대안으로 여기던 혁명가들 중 상당수가 혁명적 정치에서 이탈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그 여파로 1990년대 동안 운동 내에서 혁명적 이데올로기와 전통이 점차 약화됐고, 한국 사회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점진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의 영향력이 점점 강화됐다. 학생운동 내에서도 혁명적 전통이 약해지면서 기층 조직이 약해졌고,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대학 교육의 신자유주의화와 맞물리면서 학생들은 점차 개인주의화했다.

보수화?

그렇다면 이런 변화가 1990년대 말 이래 학생들이 보수화했다는 뜻인가? 물론 학생운동의 조직과 전투성이 약화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의 의식이 전반적으로 보수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1997년 IMF 공황과 그 후 팍팍해진 학생들의 조건은 학생들을 원자화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불만을 키웠다. 그래서 2002년 대학생 의식조사[4]에서 62.9퍼센트의 학생들이 자신의 정치성향을 진보라고 답했으며, 그 해 대선을 앞두고 86퍼센트가 진보적 대통령을 선호했다. 또, 65퍼센트 가량이 미국에 반감을 드러냈고, 그 중 40퍼센트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경제정책”을 이유로 꼽았다. 2003년과 2004년에 실시한 같은 조사[5]에서 대학생들의 진보 성향은 조금 줄어 각각 40.8퍼센트와 44.6퍼센트를 기록했지만, 진보와 중도를 합한 비율은 여전히 80퍼센트 안팎을 기록했다. 2005년의 다른 조사에서는 65.9퍼센트가 미국과 북한이 전쟁하면 북한을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이런 조사 결과는 대학생 의식의 급진화를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6]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 두 여중생이 사망한 사건에 항의한 촛불시위는 이런 누적된 불만이 특정 정세와 맞물리면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위의 여파로 노무현이 당선하자 개혁 기대감에 부푼 학생과 청년들은 그 이듬해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고 노무현 정부가 파병을 추진하려 하자, 대거 반전 운동에 참가했다. 학생들은 개혁에 대한 낙관적 기대를 갖고 있었다. 이런 기대와 열망은 2004년 노무현 탄핵에 반대하는 거대한 대중 시위로도 표현됐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2005년 이후 변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가 개혁 열망을 배신하면서부터였다. 2004년에 노무현 정부가 파병을 강행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무로 돌리자, 학생들의 개혁 기대감은 한풀 꺾였다. 그 후에도 노무현 정부가 비정규직법 개악, 한미FTA 체결 등 철저히 개혁 염원을 배신하면서 개혁 염원 대중의 기대감은 점차 냉소와 환멸로 바뀌었다. 그래서 2002년부터 2004년 초까지 학생들이 새롭게 운동에 동참했던 것과 달리, 이 때는 학생들이 쉽사리 행동에 나서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학생들이 전반적으로 보수화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개혁을 바라던 학생과 청년들은 당시 진보개혁에 대한 확신을 잃고 냉소적이 됐다. 그들 중 일부가 보수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수는 노무현 정부에 실망했지만 진보적 대안에 확신이 없는 데다 그렇다고 우익이 다시 득세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 복잡한 감정 때문에 곤혹스러워했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냉소와 환멸은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 당선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20대의 일부는 민주당과 창조한국당과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투표했지만 다수는 투표에 참가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물론 또 다른 일부는 경제 성장을 통해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고 이명박을 지지했고, 그래서 20대 때문에 이명박이 당선했다는 비난을 뒤집어썼다. 그럼에도 이것이 학생들의 전반적 보수화를 보여 준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명박 정부 초기조차 학생들은 30퍼센트가 진보, 40퍼센트가 중도이고, 나머지 30퍼센트가 보수 성향을 보이는 가운데 이 비율이 약간씩 변동했다.

정치적 급진화의 귀환

이명박 정부 임기 초반 터져 나온 촛불 항쟁은 학생들에게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게 된 전환점이었다. 2008년 촛불 항쟁은 2002년 여중생 압사 항의 촛불시위와 2004년 노무현 탄핵 반대 촛불시위와 마찬가지로 우파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상황에 대한 학생과 청년들의 불안감에서 비롯했다.

세간의 과장과는 달리 대학생들의 운동 참여가 저조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촛불 항쟁에서 대학생들이 한 구실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동맹휴업이나 점거 농성 등 대학생들이 조직할 수 있는 고유한 전투적 행동들을 결합시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촛불 항쟁 자체가 남긴 퇴적물은 다음번 폭발의 자양분이 되고 있는 듯하다. 특히 촛불 항쟁 당시에 청소년기를 거친 학생들이 2010년과 2011년에 대학에 들어오면서 대학가 분위기는 변하고 있다.

촛불 항쟁의 여파로 나타난 청소년들의 사상적 급진화는 청소년 관련 출판계 동향을 봐도 알 수 있다. 최근 청소년 교양 도서로 출판되는 책들은 단지 청소년들이 학교 교육에서 겪는 경쟁과 억압 문제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한국 현대사, 제국주의, 노동 등 분야가 넓어지고 더 급진화됐다. 심지어 2008년 경제 위기 전후로는 《청소년을 위한 자본론》 등 청소년들을 겨냥한 마르크스주의 서적들도 출판됐다.

촛불 항쟁의 여파뿐 아니라 2008년 가을 금융 위기로 시작된 경제 위기도 급진화를 자극하고 있다. 경제 정책에서 신자유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데올로기는 커다란 불신을 받게 됐다. 발전주의 경제학자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서적이 인기를 끌고, 정의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것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런 사회 저변의 급진화 분위기는 학생 사회 내에서도 변화를 불러왔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배신으로 말미암아 진보와 개혁에 대한 냉소와 환멸이 횡행하던 2005~07년까지는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서 우파 후보들이 등장해 종종 당선하거나 당선하지 못하더라도 좌파 후보들에게 공세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선거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오른쪽으로 견인하곤 했다. 그런데 촛불 항쟁과 경제 위기 이후 이런 분위기가 변했다. 운동권 후보의 당선이 늘어났고, 비운동권 후보들 중에도 노골적으로 우파적인 후보들의 입지가 좁아졌다. 학생회가 대학 내 쟁점뿐 아니라 사회 문제에도 관여해야 한다고 보는 학생들도 늘어났다.

물가 인상과 대학 청소노동자 투쟁

이런 정치적 급진화 분위기에 2008년 금융 위기를 진정시키려는 과정에서 생겨난 물가 인상 압력이 결합되면서 올해 들어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투쟁을 자극했다. 전통적으로 물가 인상은 노동계급 투쟁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고,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이런 투쟁은 혁명적 상황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한다. 올해 초 아랍 혁명은 식료품 가격 인상을 배경으로 분출했다. 혁명적 투쟁은 아니었지만, 한국의 1991년 5월 투쟁도 물가 인상과 전세값 폭등을 배경으로 벌어졌다.

지난해에도 식료품 가격과 공공요금이 빠른 속도로 올랐는데, 올해는 그 속도가 더 빨라졌다. 노동계급 가계는 앉은 자리에서 소득이 줄어드는 경험을 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노동자들은 가계 소득을 보전하고자 임금 인상 투쟁에 나서기 쉽다. 특히 물가 인상에 가장 큰 타격을 받는 노동자들은 소득 수준이 낮은 저임금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시간당 최저임금 수준도 안 되는 1백만 원 미만의 월급을 받던 대학 청소노동자들이 지난해 말부터 먼저 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지난해 말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이 학교 당국의 악랄한 탄압 속에서도 승리를 거두면서 노동자들의 투쟁 자신감이 한껏 올라갔다. 그래서 그 바통을 이어 받아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동국대·고려대·이화여대·연세대 노동자들이 투쟁에 돌입했다.

학생들은 청소노동자 투쟁에 엄청난 지지를 보냈다. 세 대학(고려대·이화여대·연세대) 청소노동자들이 공동 파업을 벌일 때, 4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파업 지지 서명을 했다.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이토록 많은 학생들이 서명에 동참한 것은 최근에 유례가 없을 정도였다.

이런 압도적 지지는 오늘날 학생들의 처지 변화를 반영한다. 초창기 대학이 지배계급과 상층 중간계급 자녀들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오늘날 대학이 팽창하면서 이제 노동계급 자녀들도 상당수가 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또, 비싼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학생이 노동계급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7] 노동계급과 연대할 가능성은 전보다 더 높아졌다. 예컨대 학생들이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한 것뿐 아니라 노동계급 가계 소득 공격과 관계 있는 등록금 문제가 올해 학생 투쟁의 주요 의제로 떠오른 것도 학생들의 투쟁과 노동계급 투쟁이 연결될 가능성을 보여 주는 사례다.

물론 많은 학생들이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한 것을 단지 학생들의 처지 변화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은 대학이 정의를 가르친다는 통념을 의문시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고려대의 교훈은 ‘자유·정의·진리’인데 학생총회에 참가한 한 학생은 청소노동자에 대한 학교 당국의 열악한 대우와 등록금 인상을 두고 ‘이것이 정의를 가르친다는 대학에서 할 짓인가?’ 하고 말했다. 대학이 표방하는 가치관이 허울뿐임에 대한 분노가 잘 드러난다.

이렇듯 사회 전반의 이데올로기 위기는 학생들에게 지적 혼란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학생들의 갑작스런 투쟁을 촉발하기도 한다. 크리스 하먼은 1968년 학생 반란을 분석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 안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 혼란의 요소들은 대개 학생 사회에서 증폭돼 나타난다. 학생 전체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사회로 진출한 후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파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이데올로기가 그들이 경험한 현실과 확연하게 동떨어져 있다면, 그들 자신이 지적 혼란에 빠지고 도덕적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다.[8]

요컨대 경제 위기 상황에서 노동계급과 피억압 대중의 고통 증가, 최근 급격한 물가 인상으로 말미암은 불만 증대와 투쟁 압력 심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위기 심화, 촛불 항쟁을 통해 급진화 세례를 받은 학생들의 입학이라는 조건들이 서로 맞물려 올해 학생들의 투쟁이 활발해진 것이다.

올해 등록금 투쟁이 보여 준 것

올해 대학생 투쟁은 등록금 투쟁이 두드러졌다. 이는 물가가 가파르게 올라 노동계급과 서민들의 가정에 커다란 부담이 되고 있는 상황과 관계가 있다. 등록금 인상은 단지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대학에 노동계급 자녀들도 많이 입학하면서, 등록금 인상은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문제가 됐다.

그런데 일부 대학의 등록금 투쟁은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지만 아쉽게도 대다수 대학의 경우는 학교 당국의 등록금 인상을 철회시키지 못한 채 마무리되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학생운동 지도부의 잘못된 노선이 적잖이 작용했다.

협상 중심의 태도를 취하며 등록금 인상에 합의한 상당수 비운동권 학생회들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높은 등록금으로 고통받는 평범한 학생들을 전혀 대변하지 않았다. 그런 학생회들이 주도하는 대학에서 등록금심의위원회(이하 등심위)는 고작 학교 당국의 등록금 인상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자리이거나, 학생회장들이 학교의 편에서 인상을 합의하는 자리였을 뿐이다.

반면 운동권들은 학교 당국과 등록금 인상에 합의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개 투쟁에 나서기는 했다. 그러나 일부는 그들 자신의 강조점 때문에 학교 당국에 맞서는 투쟁에 힘을 싣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NL 계열이 주도하는 한대련은 등심위의 파행적 운영을 폭로하면서 주로 민주적 등심위 설치를 요구했고, 취업후학자금상환제ICL 개정 등 민주당과의 협력을 통한 각종 “법, 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췄다.[9] 게다가 주류 NL 학생 활동가들은 1년 후 대선과 총선에서 반한나라당 후보들이 당선하는 것을 통해 등록금 문제 해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보므로, 당면한 학내 등록금 투쟁에서 투쟁 수위를 ‘지나치게’ 높일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다 보니 한대련이 지도하는 각급 학생회들은 대개 학내에서 등록금 인상에 대한 불만을 전투적 행동으로 조직하는 데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정치’ 투쟁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5월 이전에 학내 등록금 투쟁을 정리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들은 학생총회를 그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일회성 집회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물론 학생총회를 통해 평소보다 많은 학생들이 모여 대학 당국에 항의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학생총회에 모인 동력을 점거 농성 같은 행동으로 연결시켜야 학교 당국이 순순히 물러서지 않으려는 투쟁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예컨대 2000년 3월 말 경희대를 시작으로 수도권 대학 열 곳에서 본관 점거 농성이 확산되면서 부분적인 양보를 받아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2000년대 동안 NL 계열 학생회들은 대체로 그런 전투적 전술을 사용하기를 꺼렸다. 그 결과 투쟁들은 학생총회를 정점으로 흐지부지되거나, 소수 지도부의 상징적 점거나 단식 등으로 정리되는 양상이 해마다 반복됐다.

올해 투쟁은 고려대·인하대 등 일부 대학에서 점거 농성이 조직되는 등 전투적 행동이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 줬다. 그러나 일부 대학에서는 지도력의 약점 때문에 투쟁의 동력이 약해졌다. 예를 들어 주류 NL 계열이 이끌고 있는 일부 총학생회는 점거 농성을 처음부터 반대하거나 심지어 동력 저하를 이유로 점거 농성을 중단시키는(점거 확대를 위해 필요한 일들을 조직하기보다) 바람직하지 못한 구실을 했다.

한대련 소속 대학 총학생회들은 학생총회를 투쟁 방향과 방법을 의결하는 장으로 여기지 않고, 2012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대학생들의 불만을 보여 주는 기회로만 제한하려 했다. 그래서 학생총회 이후 투쟁이 지속됐던 대학들에서 이들은 투쟁을 제대로 이끌기는커녕 김빼는 구실을 했다. 그러고는 학내 투쟁과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정부에 반값 등록금 이행을 촉구하는 학생회 대표자 기자회견이나 “국회의원 서약운동” 등으로 투쟁을 전환했다.

정부 자신이 등록금 인상을 부추기고 있고, 교육비를 국가가 책임지라고 요구해야 하므로 대정부 투쟁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대정부 투쟁의 동력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공식 학생회 조직의 상층 지도부만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다. 기층을 조직하려면 개별 대학에서 벌어지는 등록금 인상에 맞서 투쟁을 제대로 건설하고, 그 속에서 대정부 투쟁의 필요성을 차근차근 설득해가면서 개별 대학 투쟁과 대정부 투쟁을 연결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주류 NL 계열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점거 같은 전투적 투쟁 방법을 자제하면서 각 대학 당국을 상대로 벌이는 등록금 투쟁은 의미가 없다고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정치’ 투쟁의 필요성을 주장하곤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이것은 “대정부 교섭”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났고, 최근에는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을 통한 정권교체-정책변화 추구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올해 등록금 투쟁에서 NL 계열이 드러낸 문제점이 2000년 들어 강화된 개혁주의, 인민전선 전략과 연결돼 있음을 보여 준다. 이에 대해 최일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NL 계열 학생회들]은 비상학생총회라는 직접민주주의 방식을 학생회라는 대의 제도의 순전한 보조물로만 여겼다. … 또한 NL 계열 활동가들은 점거라는 전투적 투쟁 방법을 두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해 한사코 피하려 애썼다.
이것은 NL 계열의 인민전선 노선에서 비롯한 개혁주의와 관계 있는 자세다. 좌파가 민주당과 전략적 연합을 추구하는 노선은 좌파가 민주당의 강령과 투쟁 전술 수위를 넘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효과를 낸다. 이 노선을 따르다 보면 좌파는 민주당 수준으로 매우 말랑말랑해질 수밖에 없다. …
사회 전체적으로도 NL 계열과 그 밖의 다른 주류 진보 세력들의 인민전선 노선 추구로 우리는 이명박의 말기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대중운동이 폭발적으로 분출하지 않는 역설에 직면해 있다. 바로 진보진영 주류의 선거주의 때문이다. 모든 것이 ‘반MB’ 구호(형식적으로 이해된) 하에 합법적 정권 교체 수단인 내년 총선-대선에 맞춰져 있다. 그 때까지 기다리라는 노골적인 메시지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야권 연대’만 되면 박근혜도 이길 수 있다니 모든 것은 야권 연대를 위해 희생돼야 한다.
이러한 선거주의는 대중의 자주적 활동을 전혀 고무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대중의 자주적 행동이 어느 수위를 넘으면 선거주의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괜시리 우파만을 이롭게 하는 몹쓸 일이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중은 수동적이 되도록 고무된다.
게다가 민주당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없으니 민주당은 운신의 폭이 넓어져 좌파인 척한다. 좌파는 민주당과의 연합을 합리화하기 위해 민주당을 좌파적으로 색칠한다. 대중 속에서 민주당에 대한 환상이 자라난다. 적어도 ‘차악’(한나라당과 박근혜가 최악이라면)으로 취급된다.
다시금 이는 선거주의를 조장한다. ‘까짓것, 민주당이 집권하기만 해봐라. 많은 게 달라질 테니. 적어도 한나라당 정부보다야 낫겠지.’
이런 정서가 대중의 불만과 대중의 행동 사이의 격차를 설명해 준다. 그래서 등록금 투쟁에서도 학생 대중의 불만과 행동(또는 스스로 행동할 자신감) 사이에 결국엔 격차가 있었다.
학생 대중 의식의 이런 모순을 NL계 학생 리더들은 해소시킬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대중 의식의 모순은 대중 자신의 행동으로써만 극복 가능한데, 정확히 이 점을 위로부터의 사회주의인 NL 사상은(사실 PD 사상도) 용인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NL계 핵심 리더들이 아닌 NL 주변부의 단순 좌파 민중주의 학생들은 다를 수 있다. 이 점은 그저 말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공동 투쟁을 하는 가운데서만 드러날 수 있다. 그래서 공동전선 전술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10]

학생과 노동계급

다양한 사회 집단이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이끌 수 있는 집단은 노동계급뿐이다. 노동자들의 노동이 이윤의 원천이므로, 그들이 노동을 중단할 때 이윤 생산도 마비된다. 게다가 자본주의 생산의 사회적 성격 때문에 노동계급은 집단적으로 단결해야 하는 끊임없는 압력에 놓여 있다. 따라서 다양한 사회 집단의 투쟁은 바로 착취에 맞선 노동자 대중 투쟁과 결합될 때 가장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상적 시기에 노동계급 투쟁에는 개혁주의의 영향력이 비교적 강하다. 개혁주의의 뿌리는 노동계급이 겪는 소외된 노동이다. 노동계급은 노동하면서 생산과정도 생산물도 통제하지 못한다. 착취 경험 때문에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체제에 끊임없는 불만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소외 때문에 평상시에는 체제를 근본에서 변혁할 자신감은 없다. 노동계급은 투쟁 경험을 통해 이런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다.

착취에 맞서 투쟁하려는 노동자들은 대체로 노동조합으로 조직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기업주와 노동자 사이를 중재하는 구실을 하는 노동조합의 상근 간부층[11]의 존재가 일상적 시기에 개혁주의를 강화하는 사회적 기반을 제공한다. 한국 사회도 지난 20여 년간 권위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불완전하지만 점차 이행하면서 기업주와 노동자 사이를 중재하는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이 형성됐다.[12]

노동계급의 산업 투쟁은 대부분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을 매개로 벌어지므로, 그들의 통제력을 무시할 수 없다. 일단 혁명적으로 분출하면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지만, 그러기 전까지 노동자 투쟁은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의 통제 때문에 달아오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학생들은 노동계급과 다르다. 기본적으로 학생들은 생산 관계와 결부된 집단이 아니다. 따라서 착취를 둘러싸고 맺는 관계, 즉 계급 관계 아래 놓여 있지 않다. 물론 예전보다 많은 학생들이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고, 이런 학생들의 처지 변화 때문에 노동자들과 연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학생 집단 전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이 노동계급인 것도 아니다. 학생은 “최종 계급 지위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청년들로 이루어진 일시적 집단”이라고 봐야 한다.[13]

이는 학생들이 노동계급과 달리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생산관계에 얽매여 있지 않으므로 투쟁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분출할 수 있고, 학생들은 노동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자유롭게 조직할 수 있다. 그래서 일상적 시기에도 학생들 사이에서는 사상을 중심으로 소수의 사회주의자들이 형성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학생들이 더는 1980년대나 1990년대 초반과 같이 ‘엘리트 집단’이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더는 정치투쟁 중심이 아니라 학생들 자신이 직접 고통을 겪고 있는 쟁점인 등록금과 청년실업 문제를 중심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4] 물론 학생운동이 그런 쟁점을 다뤄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학생운동의 성격을 일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전히 학생들은 기성 체제의 불의에 맞서 정치투쟁에 앞장서 나설 수 있고, 이런 투쟁은 노동자 투쟁의 도화선 구실을 할 수 있다. 또, 급진 사상을 중심으로 소수가 조직될 수 있고, 그 소수가 학생 투쟁에서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물론 다수의 학생들은 일상적 시기에 대개 정치적 무관심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학생들이 자본주의 대학에서 겪는 소외라는 현실 때문이다.[15]

학생들은 노동시장 상태나 시험 성적처럼 예측하기 힘든 것들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 시험 제도는 학생들을 응집력 있는 집단으로 단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자화시킨다. 학생 각자의 운명은 다른 학생들과 분리된 채 개개인의 시험 성적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그들은 억압받는 집단이다. …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캠퍼스의 고립된 삶 때문에 더 심화된다. 학과 과정이 중·고등학교보다는 덜 엄격하지만, 학과 내용이나 보직교수 임명, 등록금 수준, 기타 여러 가지에 대한 결정권은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16]

학생들은 단결해서 싸울 잠재력 덕분에 소외를 극복할 힘이 있는 노동계급과 달리 그들 자신의 힘만으로는 대학과 자신의 미래를 집단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소외라는 현실에 놓인 학생들은 대부분 무기력감을 느끼고 수동성과 현실도피적 행태들(음주나 컴퓨터 게임, 마약 문화 등)을 보인다.

그러나 학생운동 내 일부 급진좌파 단체들처럼 대학생들이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로 말미암아 보수화했다며 학생 투쟁의 잠재력을 깎아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17] 학생 사회주의자들은 일상적 시기에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는 다수의 학생들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소외가 어떤 특정 조건과 맞물려 갑작스런 투쟁으로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68년 프랑스 등지의 학생 투쟁이나 2000년대 한국의 대규모 촛불시위 때 그랬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처럼 갑작스럽게 분출하는 학생 투쟁에서는 소수의 사회주의자들도 투쟁을 이끌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학생 투쟁은 상근 간부층이 개혁주의를 뒷받침하는 노동조합 투쟁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첫걸음은 노동계급 투쟁보다는 학생 투쟁에서 나타날 수 있다. 정치적 급진화가 학생들의 폭발적 투쟁을 자극하면 그것이 노동자 투쟁의 방아쇠 구실을 할 수 있다. 1968년 반란과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 모두 학생들의 투쟁이 거대한 노동자 투쟁의 불을 댕겼다.

학생회 운동

물론 학생회 지도자들이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해서, 늘 투쟁을 잘 이끈다는 뜻은 아니다.

1987년 6월 항쟁부터 1991년 5월 투쟁까지 대략 4년간 학생들의 폭발적 투쟁이 지속될 때만 해도 학생회는 명백히 투쟁 기구 성격을 띠었다. 당시 운동을 이끈 세력은 비록 스탈린주의적이긴 했지만 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 몰락 이후 스탈린주의자들이 대거 혁명적 전통을 버리고 점차 개혁주의적으로 변모했고, 그들이 이끄는 학생회 운동의 성격도 달라졌다. 이제 학생회는 투쟁 기구의 성격도 일부 남아 있지만 조합적 성격(구성원 전체를 대변하려는)이 강화됐다.

물론 학생들 사이에 공통된 불만이 있을 수 있으므로, 학생회는 노동조합처럼 학생 권익 방어 구실을 할 수도 있다. 한편 학생들은 단일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 아니므로 학생회는 노동조합과 달리 얼마든지 이해관계 중심으로 조직되지 않을 수 있다. 학생들은 대학에서 이데올로기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기를 강요받는데, 이는 학생회가 전체 학생들의 평균적 의식을 대변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나타난다.

학생 활동가들은 대부분 이런 압력을 추수한다. 특히 NL 계열 활동가들이 이런 경향이 강한데, 그들이 점점 개혁주의로 변모하면서 스탈린주의 당 개념(운동은 모두 당의 통제를 따라야 한다는 개념)과 더불어 사회민주주의 당 개념(당이 계급 전체를 대표한다거나 계급의 평균적 의식을 대변한다는 개념)을 동시에 받아들이게 된 것과 관계 있는 듯하다.

물론 오늘날 학생들 사이에 정치적 급진화가 일어나고 있으므로, 학생회가 학생들의 평균적 의식을 대변해야 한다는 압력 하에서도 특정 운동을 주도하거나 그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학생회 운동이 더는 의미가 없다고 선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 학생들의 급진화가 불균등하고 모순적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학생들 다수는 불만이 있어도 대개 행동에 나서지 않고, 비교적 소수의 학생들만이 급진 사상에 귀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평균적 의식을 대변한다는 관점으로는 건설할 수 있는 운동의 폭이 매우 협소해질 것이다.

게다가 선출된 학생회 리더들이 학생들의 평균적인 의식조차 대변하지 못할 때도 흔하다. 학생들의 투쟁 전통과 조직화 전통이 약한 곳에서는 학생회장 경력을 정치권 진출이나 취업에 활용할 스펙으로 간주하는 경력주의자들이 학생회 리더가 되는 경우도 꽤 많다.

따라서 학생회 조직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거나 심지어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이번 등록금 투쟁에서도 주류 NL 계열 학생회 활동가들이 보인 “학생회라는 조직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는” 태도는 투쟁에 큰 난관을 가져왔다. “그들은 비상학생총회라는 직접민주주의 방식을 학생회라는 대의 제도의 순전한 보조물로만 여겼다. 그래서 언제나 논의를 중앙운영위원회나 전체학생대표자회의의 틀 안에만 한정지으려 애썼[다.]”[18] 심지어 중앙운영위원회가 등록금 투쟁에 열의가 없고 심지어 반대할 때조차 그랬다.

최일붕은 학생들의 불만과 분노가 비상학생총회 소집권 인정이나 총회 성사, 점거 발의 등의 형식으로 표출됐을 때 학생회들이 보인 동요와 좌충우돌이 “학생회가 운동 단체의 성격과 복지 제공자(봉사자)의 성격을 다 갖고 있는 데서 비롯한다”고 지적한다.

이 두 가지 성격 중 복지 제공자의 성격이 학생회의 어젠다나 대중의 인식에서나 모두 학생회의 대표성을 압도하기 쉽다. 가령 학외 민중 투쟁 지지가 중요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학내 투쟁이 당면하고 중요한 때조차 학생회는 축제 등 학내 행사 조직에 더 신경쓰는 게 한 사례다.
만약 학생회 집행부가 자신을 주로 봉사/복지 제공자로 여긴다면 그 기구는 학교 당국에 맞서 학생들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복지를 제공받기 위해 학교 당국의 파트너 구실을 하고 싶어 하게 될 것이다.[19]

요컨대 학생운동을 학생회 운동으로 환원하지 말아야 한다. 최일붕이 강조하듯이 학생 좌파들은 “학생회 안팎 모두에서 조직해야 한다.” 필요할 때는 교육투쟁이나 노학연대 등 학생운동이 단결해 싸워야 할 과제들을 둘러싼 투쟁기구를 학생회와 별도로 건설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런 기구에 투쟁하려는 학생회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이 기구는 학생회 공식 기구의 결정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해당 투쟁을 이끌면서 거꾸로 학생회들이 공동 투쟁기구의 결정을 따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난해 11월 영국에서 등록금을 대폭 인상한 데이비드 캐머런 정부에 항의하고자 학생 5만 명이 보수당사를 점거했을 때, 영국의 공식 학생회 조직인 전국학생연합NUS은 점거에 반대했다. 그러나 전국학생연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좌파 활동가들이 학생회 공식 기구에 연연하지 않고 지난해 초부터 조직했던 교육활동가네트워크EAN가 주도해 보수당사 점거 투쟁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20] 만약 당시 학생들이 정치적·조직적 대안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런 전투적 투쟁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맺으며

이런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또 다른 종류의 조직이 필요하다. 노동계급 투쟁과 학생 투쟁의 최상의 경험들을 일반화한 이론을 갖추고, 현재 계급 세력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계급투쟁의 전반적 밑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개별 투쟁에 적용하면서 전체 계급 투쟁이 전진하도록 애쓰는 변혁적 정치 조직 말이다.

오늘날 급진화하는 학생들조차 대체로는 개인주의적이고 조직의 필요성을 불신하는 경향이 강하다. 학생운동은 본래 전통이 약하고 경험이 적어 투쟁의 전략·전술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는데도, 급진화하는 많은 학생들이 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조직은 개인이 미처 할 수 없는 수준의 과제를 성취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조직을 통해 구성원들은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협력에 바탕을 두고 일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변혁적 정치 조직은 학생들이 부문적 시야에 갇히지 않도록 도움을 준다. 학생들의 폭발적 투쟁은 그들이 자본주의 대학에서 겪는 소외를 부분적으로 완화시킬 수는 있어도 소외의 근원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폭발적으로 투쟁에 나섰다가도 그들 자신의 힘에 한계를 느끼면서, 금세 투쟁에서 이탈하곤 한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제거하는 투쟁은 오로지 학생 투쟁이 노동계급 투쟁을 촉발해, 노동계급이 다른 피억압 집단과 함께 혁명적으로 분출할 때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학생들의 투쟁도 전체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예컨대 한 학교의 등록금 투쟁에서도 단지 그 학교 학생들의 이익만이 아니라 비싼 등록금 때문에 고통받는 넉넉지 못한 가정의 대학생들 전체와 노동계급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 더 일관되게 투쟁할 수 있다.

변혁적 정치 조직 활동가들은 이런 관점을 가지고 투쟁 속에서 능동적 구실을 할 수 있고, 투쟁이 기로에 서는 국면마다 투쟁이 전진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학생들을 이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오늘날 학생들의 정치적 급진화는 올해 들어 본격적으로 캠퍼스에서 투쟁의 기운을 북돋는 듯하다. 비록 올해 등록금 투쟁이 당장에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마무리되는 듯하지만, 한나라당 내에서조차 반값 등록금 공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만큼 지배자들은 학생들의 불만과 투쟁을 걱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투쟁은 예기치 않게 폭발하는 경향이 있고 결정적으로 노동계급 투쟁을 촉발하는 촉매제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경제 위기가 지속되고 지배자들끼리의 다툼이 심해지면서,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점점 대중에게 의문시되고 있다. 학생들은 이럴 때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새로운 급진화 분위기가 형성돼 투쟁이 오랜만에 분출하게 되면, 그것이 늘 새로운 투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에 맞게 조직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학생 투쟁에도 오래된 문제들이 비슷하게 반복돼 나타난다. 그런 문제들을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대안을 구축하고자 노력하는 활동가들이 얼마나 큰 규모로 조직되느냐에 따라 향후 학생운동의 전망은 달라질 것이다.

MARX21

참고 문헌

김영경 2010, ‘청년운동, 새로운 노동운동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문화/과학》 62호(2010년 여름).
전국학생행진 2011, 《행진》 5호.
정병호 2010a, ‘학생·소외·사회변혁’, <레프트21> 온라인(http://www.left21.com/article/7904)
정병호 2010b, ‘학사정연(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의 엘리트주의 비판’, <레프트21> 온라인(http://www.left21.com/article/7903)
조성주 2008, ‘대학생 운동, 선봉대가 아니다’, <통일뉴스>(2008.2.25).
캘리니코스, 알렉스 2009, ‘자본주의 국가의 다양한 형태’, 《마르크스21》 4호(2009년 겨울).
클리프, 토니 & 글룩스타인, 도니 1995,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조합투쟁》, 풀무질.
최일붕 2011, ‘2011년 봄 등록금 투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하먼, 크리스 2004, 《세계를 뒤흔든 1968》, 책갈피.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 2009, ‘학생회는 아직도 유효한 운동의 진지인가?’, <신질서> 23호(2009년 12월).
한대련 2011, 《7기 상반기 정기 확운위 자료집》.
홍두승·설동훈 2002, ‘2002년도 한국 대학생의 의식과 생활에 관한 조사연구’.
홍두승·설동훈 2003, ‘2003년도 한국 대학생의 의식과 생활에 관한 조사연구’.
홍두승·설동훈 2004, ‘2004년도 한국 대학생의 의식과 생활에 관한 조사연구’.
Swain, Dan 2011, ‘The student movement today’, International Socialism 130(Spring 2011).
<조선일보>
<충대신문>
<한겨레>
[1] <한겨레>(2011.4.4).
[2] 특히 보수 언론들은 학생회 선거가 투표율 미달로 무산될 때마다 이 점을 부각하곤 했다. 최근에는 신조어도 만들었다. 2010년 들어 <조선일보>는 1988년 이후 출생 세대들을 “글로벌 마인드와 외국어 구사능력으로 무장한 G(글로벌)세대”라고 호명하면서, 이들의 자기 개발 능력이 “저성장·고령화의 덫에 빠진 한국사회에 어떤 활력을 불어넣을까” 하고 개인주의와 성장 담론을 부추겼다.
[3] 가장 노골적인 글은 한양대 겸임교수 김용민이 2009년 6월 8일자 <충대신문>에 기고한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는 제목의 글이었다. 이 글에서 김용민은 20대가 현재 겪는 고통이 그들 자신이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며, 자신은 20대는 포기했고 10대에게 희망을 건다고 썼다. 이 글은 인터넷에서 “20대 개새끼론”으로 회자됐다.
그런데 이와 같은 20대에 대한 과장된 적개심은 대체로 1980년대 학생 투쟁의 향수를 가지고 있으면서, 오늘날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듯하다. 핵심은 왜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에게 투표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많은 문제를 누가 정권을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치환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나 그토록 과장된 반응이 나올 수 있다. 투표가 아니라 자기해방을 위한 투쟁을 중시하는 관점에 선다면, 20대가 자신감을 회복하고 투쟁에 나설 수 있도록 설득하고 독려하지, 그토록 적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4] 홍두승·설동훈 2002.
[5] 홍두승·설동훈 2003, 홍두승·설동훈 2004.
[6] 2005년 8월 광복 60주년 여론조사(<조선일보> 의뢰, 한국갤럽).
[7] 이런 점에서 세대별 노조를 지향하는 청년유니온 지도부가 청년운동을 노동운동으로 환원하려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 청년유니온 지도부의 주장을 보려면, 김영경 2010을 참고할 것.
[8] 하먼 2004, p66.
[9] 한대련 2011.
[10] 최일붕 2011.
[11]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의 구실에 대해서는 클리프 & 글룩스타인 1995, 2장을 보시오.
[12] 캘리니코스 2009, pp243-244.
[13] 하먼 2004, p65.
[14] 대표적 글로는 조성주 2008.
[15] 이는 대학 교육의 팽창과 관계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먼 2004와 정병호 2010a를 보시오.
[16] 하먼 2004, p66에서 재인용.
[17] 현재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사노위) 학생분회에 속해 있는 구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학사정연)의 입장이 대표적이다. 학사정연 2009. 이에 대한 비판은 정병호 2010b을 보시오.
전국학생행진도 학생들이 투쟁에 나설 가능성을 낮게 보기는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체제 자체의 모순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그에 맞서는 조직적 운동은 매우 미약하다는 것이다. … 대중들은 불의에 집단적으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빈곤과 불안정을 개인적으로 감내하는 편을 택하고 있다.” 전국학생행진 2011, p52.
[18] 최일붕 2011.
[19] 최일붕 2011.
[20] Swain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