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세계를 뒤흔드는 아랍 혁명 ― 의미와 전망

튀니지의 민중 혁명

샴세디네 므나스리 6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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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세디네 므나스리는 튀니스에 있는 마누바대학교 마르크스주의자 교수다.

번역: 천경록

2011년 1월 14일, 튀니지 민중이 한 달간의 반란 끝에 대통령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를 몰아냈다. 벤 알리의 축출은 혁명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바꿔 놓았다. 내 생각에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번 혁명은 완전히 아래로부터 발생했다. 둘째, 반동 세력은 옛 질서를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 계획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이 혁명은 실업, 지역 간 불균형 발전, 민주적 권리 박탈에 대한 진정한 노동계급적 대응이었기에 서발턴의 열망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벤 알리 정권은 마침내 굴복하기까지 3주 동안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정권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시위에 대처했지만 결국 1월 14일, 민중의 의지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벤 알리는 튀니지를 떠났다. 그가 남긴 것은 앞으로 청산하는 데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독재의 유산이다. 그럼에도 청산 작업은 이미 시작됐다.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책임지고 있는 임시 정부가 그 첫발을 내디뎠다.

역사

다음은 튀니지 시인 아부 카셈 셰비가 1933년에 쓴 시구詩句다.

민중이 한번 생을 갈망하기 시작하면
운명은 이에 순종해야 한다
더는 밤의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리
더는 쇠사슬이 우리를 구속하지 못하리[1]

이 시는 1883년에 튀니지가 프랑스 보호령이 된 이후 이에 저항해 온 튀니지 민중의 저항 문학의 일부였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이 튀니지 민족 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한 듯하다. 농민들이 주를 이루던 튀니지 사회는 문학 표현보다는 위로부터의 정치에 더 많이 호응했다. 셰비의 시가 발표됐을 즈음인 1934년 신입헌당Neo-Destour Party, NDP이 창당했다. NDP는 평화적인 수단과 협상으로 독립을 얻어내려 한 교육받은 엘리트 층의 정치적 야망을 대변했다.[2] 이후 민중의 의지는 NDP의 당파성에 압도당했고, 튀니지 독립 투쟁은 셰비가 기대고자 했던 민중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게 됐다.

1940년대에는 NDP 내에서 하빕 부르기바가 유일 지도자로 떠올랐다. 부르기바는 튀니지 민족 해방 운동을 프랑스를 상대로 한 외교와 협상이라는 목표에 종속시켰다. 그는 NDP를 도구 삼아 ‘보호와 복종’이라는 공식에 바탕을 둔 탈식민화 로드맵을 수립했다[NDP가 민중을 보호해 주고 민중은 그 대가로 NDP에 복종한다는 공식 ― 옮긴이]. 대다수가 농민이던 튀니지 민중은 당 지도자가 자신들의 보호자라고 순순히 믿었다. 부르기바는 자신이 “민중의 화신”이며 “민중의 대의를 위해 매우 열심히, 그리고 잘 싸운 나머지 그[부르기바 ― 옮긴이]의 삶의 궤적은 민중의 그것과 하나가 됐다”고 주장했다.[3]

1940년대에 셰비의 시는 농민과 광부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 듯했다. 부르기바 사상만이 튀지니를 독립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지도 이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950년대 초에 부르기바 일당은 민족 해방 문제를 NDP에 유리한 방식으로 왜곡했고 프랑스 식민 지배에 맞선 저항에서 농민 반란이 할 수 있는 구실을 부정했다. 독립한 지 1년 뒤인 1957년 부르기바는 NDP의 당명에 ‘사회주의’를 덧붙이면서 민중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NDP는 사회주의입헌당SCP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사회주의’ 칭호는 부르기바 정권의 성격과 전혀 맞지 않았다. 독립 투쟁 기간 중에 그는 미국의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아 매우 강경한 반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했는데, 그 노선은 특히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다.[4] 이는 자유주의 서방 세계를 동맹으로 끌어들여서 프랑스에 압력을 넣어 독립을 얻어낸다는 부르기바의 탈식민화 전략을 반영하는 노선이었다.

튀니지 현대사는 부르기바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거기서 프랑스 점령에 맞선 대중 반란은 가끔 스치듯이 언급될 뿐이다. 예컨대 1952~54년에 일어난 ‘펠라가Fellagha’ 운동은 역사상 가장 큰 농민·광산 노동자 운동이었고, 내가 보기에 튀니지 독립이 가능했던 것도 이 운동 덕분이었는데, 그럼에도 오늘날 펠라가 운동을 기억하는 튀니지 사람은 매우 소수다. ‘펠라가’는 프랑스 군인과 정착민 들을 공격한 유일하게 조직된 게릴라 투사들이었다. 그들의 지도자 라자르 쉬라이티는 게릴라 작전을 계획하고 이끈 인물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대체로 1962년에 쿠데타를 시도했던, 부르기바의 정적으로만 기억된다.[5]

펠라가 운동의 활약상은 튀니지 국립 기록보관소NAC의 비공개 문서 더미에 묻혀 있다. 튀니지 독립에서 한 그들의 기여는 지금껏 철저히 숨겨졌다. 1956년 이후 수십 년 동안 공식 역사는 오직 부르기바의 공로만을 인정했다. 그러나 부르기바는 무장 투쟁을 이끌지도 않았고, 외교의 힘을 신봉했고, 서방 세계를 공공연히 찬양했고, 반아랍주의 담론에 의지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6] 1956~87년 사이의 부르기바 정권 하에서 그의 역사적 위상은 크게 부풀려졌다. 그는 “최고의 투사”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데 이어 1975년에는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됐다.[7]

그러나 12년 뒤, 84세의 부르기바는 종신 집권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의 통제를 벗어난 소요 사태 때문이었다. 1987년 11월 7일,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는 소요 사태를 이용해 “백색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부르기바의 유산을 모두 청산하기로 결심하고 ‘11월 7일 선언’을 발표해 앞으로는 “종신 대통령이 없을 것”이며 “민주주의”의 새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했다.[8] 그러나 이런 약속과 달리 벤 알리 정권 하에서는 국가가 시민사회를 완전히 삼켜 버렸다. 벤 알리의 정당인 민주헌정연합RCD은 말만 과거와의 결별을 표상하는 당이었지, 사실 새로운 독재 권력의 도구일 뿐이었다. 벤 알리는 RCD를 동원해 부르기바의 왕정 체제였던 튀니지 국가를 진정한 과두 지배 체제(벤 알리와 그의 부인 일가가 지배하는)로 바꿔 놓았다.

23년간 지속된 벤 알리의 독재는, 우리의 귓가에 여전히 맴돌고 있는 셰비의 시를 현실로 만드는 데는 외교관도, 협상가도, 카리스마적 지도자나 정치인도 필요 없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것은 지금껏 튀니지 역사에 어떤 공백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며, 민중이 세상을 한탄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진정 “생을 갈망”하면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2010년 12월 17일은 민중의 “생에 대한 갈망”이 오직 아래로부터만 촉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어느 젊은 청과물 노점상이 변화의 불씨가 됐다. 그는 자기 몸을 불살라 제2공화국으로 가는 길을 밝혔다. 그럼에도 벤 알리 정권처럼 단단히 뿌리 내린 전체주의 체제가 어떻게 그토록 빨리 무너져 내릴 수 있었느냐는 의문은 남는다. 이 물음에 답하려면 모종의 위기 이론이 필요하다.

허울뿐인 민주주의

벤 알리 치하의 튀니지는 허울뿐인 민주 국가였다. 그것을 뒷받침해 온 것은 가상의 대의제 정치였다. 튀니지가 다당제 국가라는 신화는 1987년 이래 유지돼 온 민주화 담론과 결부돼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집권 여당이 정치 무대를 완전히 독점해 왔다. 2011년 1월 17일까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소속 정당이었던 RCD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당에 충성할 것을 강요했다.[9] 다른 한편, 튀니지 헌법은 당과 국가의 분리를 어디서도 언급하지 않는다.[10] 각료들을 비롯한 정부 관료들은 강제로 RCD에 가입했다. 승진하거나 보직을 얻으려고 해도 당원증이 필요했다.

둘째, 벤 알리의 ‘민주주의’ 하에서 야당은 엄격하게 선발됐다. 야권은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허가 받은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불법 세력이었다. 허가 받은 야권 세력에는 허수아비 정당 두 개와 급진 정당 두 개가 있었다. 전자는 민주연합당UDU과 인민통합당PPU으로, 이들은 벤 알리를 지지했고 RCD와 유사한 노선을 채택했다. 이들은 심지어 선거에도 나가고 대통령 후보도 세웠다. 그러나 한 통계 수치를 보면, 이들이 선거에 나간 목적이 오직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고 그 대가로 이권을 챙기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11] 이와 달리 허가 받은 급진 정당들은 분명히 정권 반대 세력이었다. 온건 좌파 운동인 아타지디드(쇄신 운동)와 세속적인 세력인 진보민주당PDP이 그들이다. 불법 정당으로는 급진 이슬람주의 노선의 이슬람 르네상스 운동(엔나흐다)과 튀니지 노동자공산당PCOT이 있었다. 벤 알리 정권은 이들을 광신도나 근본주의자로 매도하며 배제했다.[12]

벤 알리식 ‘민주주의’의 셋째 특징은 민주적 권리와 인권에 대한 공격이었다. 정권의 탄압을 받은 시민 단체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너무 길지만, 그 가운데 둘만 언급해도 정권의 폭압성을 알 수 있다. 튀니지인들의 기본권을 위한 국민회의CNLT, National Council for Liberties in Tunisia[13] 고문방지협회APT, Association for the Prevention of Torture[14] 그것이다. CNLT는 1990년대 초 RCD가 정권의 공식 기구가 된 이후 야권이 처한 열세를 만회하려는 의도에서 창립됐다. 다른 힘 있는 야당이 없었기 때문에 CNLT가 앞장서서 정권과 싸워야 했다. 2004년 대선에 벤 알리가 재출마할 수 있도록 헌법을 뜯어고치려고 실시한 2002년의 국민투표를 기점으로 CNLT의 활동은 대대적으로 확대됐다. 국민투표 이후 CNLT는 인권 단체, 시민권 운동과 손잡고 튀니지인들의 권리 박탈을 규탄했고 억압적 정책을 철회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다.[15] 시위가 계속된 끝에 CNLT는 2007년 5월 해산당했고, 이후 지하조직이 됐다.[16]

튀니지인권연맹과 긴밀히 공조해 온 APT는 튀니지 감옥과 구치소에서 일어나는 인권 침해를 조사해 왔다. 특히 2003년 제정된 ‘반테러법’에서 비롯한 인권 침해 사례들을 조사하는 것이 APT의 주된 활동이었다. 악명 높은 이 반테러법은 조항이 모호하다. “테러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제정된 이 법은 2002년 4월 제르바Djerba의 유대교 회당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를 계기로 제정됐다.[17] 그런데 벤 알리 정권은 “테러”의 정의를 더 확대해서, “공공질서를 교란”하는 것으로 보이는 행위는 어떤 것이든 테러에 포함시켰다.[18] 정부 정책에 항의하거나 파업 또는 시위를 조직하려는 야권의 시도는 대부분 공공질서 교란의 조짐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반테러법은 ‘고무줄 적용’이 가능했고, 많은 인권 활동가와 급진 야권 인사 들이 반역이나 반역 모의 혐의로 구속됐다.[19]

APT는 이 같은 법률 확대 해석을 반박했고 반테러법 남용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APT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APT 회원이라 해서 고문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20] 정권은 수감자들을 고문하지 말라는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2003년 나스라위는 튀니지에서 “고문이 체계적으로 자행”되며 “정치적 이유로 … 구속된 사람들은 누구나 고문을 당한다”고 주장했다.[21] 나스라위는 반테러법의 피해자들에 관한 통계와 “체계적 고문과 그에 관한 증언”을 담은 2백9쪽짜리 보고서를 편집했다.[22] 최근에는 APT의 노력의 결과로 유엔 보고서조차 튀니지 당국의 공식적 선언과 “벤 알리 치하 튀니지에서의 고문, 비밀 구금, 경찰 폭력”이라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유엔 보고서는 정권이 “테러의 정의를 남용”한 것도 문제 삼았다.[23]

혁명으로 가는 길

아래에서는 튀니지 혁명을 재촉한 결정적 요인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 세 가지를 밝히려 한다.

실업

튀니지 국립통계원의 인구 조사 결과를 보면 2009년 튀니지의 실업률은 13.3퍼센트로 마그레브 지역[아랍어로 해가 지는 지역이라는 뜻으로 모로코·알제리·튀니지를 아우르는 북아프리카 지역을 말한다 ― M21]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24] 벤 알리 정권은 줄곧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지만 통계 수치를 보면 실제로 창출된 일자리는 극소수였고 그마저도 대부분 정부 고위층 자제들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계은행은 튀니지 인구 1천43만 3천 명 가운데 대졸 무직자가 약 33만 6천 명에 이르고 극소수만이 취직할 가망이 있다고 추정했다.[25]

부패

튀니지에서 부패는 주로 경제외적 요인의 산물이다. 그 요인이란 결국 과두 지배 체제와 관료제다. 과두 지배 체제는 강력한 관료제를 낳았고, 이 관료제가 튀니지 정치와 부의 분배를 좌지우지했다. 이런 식으로 벤 알리 정권은 23년 동안 나라를 수탈했다. 벤 알리와 그의 처 레일라 트라벨시의 권력 남용이 부패를 조장하고 강화하고 확산시켰다. 첫째, 주요 공장과 기업과 상업 중심지가 벤 알리의 고향인 사힐Sahil 지역과 수도인 튀니스에 몰려 있다는 것은 얼른 봐도 알 수 있다. 둘째, 이 지역들에 산업이 몰린 것은 벤 알리 일가의 지역적 이해관계와 레일라 트라벨시 쪽 친척들의 끝을 모르는 탐욕 때문이다.

트라벨시 일가의 부 독점 구조는 벤 알리 일가의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데, 그 주된 이유는 트라벨시 일가가 더 노골적으로 경제를 쥐락펴락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거의 모든 산업 부문과 금융 전반을 통제했다. 트라벨시 일가의 횡포는 경제적 이익을 독차지하고 튀니지 국부를 남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대다수 국가 기관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얼마 전에 니콜라 보Nicolas Beau와 카테린 그라시에Catherine Graciet는 트라벨시 일가의 비리와 영향력을 살펴보고자 《카르타고의 섭정 왕후The Regent of Carthage》(2009)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저자들은 말 그대로 벤 알리를 대신해서 튀니지를 통치한 그의 처를 “섭정” 왕후로 표현했다. 이 책에서 “카르타고”는 카르타고 교외에 있는 대통령궁을 지칭하는 말인 동시에 기원전 814년에 디도 여왕(엘리사)이 건국한 도시 국가를 상징하는 말로도 쓰인다. 이 책은 레일라 트라벨시를 튀니지의 엘리사로 비꼬듯이 묘사한다.[26]

그런가 하면 섭정 왕후의 친척들은 절박한 처지에 놓인 튀니지인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흡혈귀들로 그려진다. 이들은 과두 지배 체제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 카르타고를 자기들 통제 하에 뒀다. 최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이러한 통제의 성격에 대해 논평한 바 있다.[27] 그들이 국가와 사회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의회와 사법부 같은 강력한 기관을 조종할 수 있었던 덕분이라는 것이다.[28] 특히 사법부는 2001년부터 정권의 협박을 받아 왔다. 부와 권력에 눈이 먼 트라벨시 일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장주·사업가·농민들의 재산을 몰수했고 은행 대출을 강제로 받아내고서는 한 번도 갚지 않았다. 그리고는 법률 소송을 차단하려고 보안경찰을 동원해서 판사들을 위협하고 공격했다. 사법부 옥죄기가 절정에 달한 것은, 사법 체계를 감시하는 기구로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튀니지 판사 협회 이사회Legitimate Board of the Association of Tunisian Judges를 정권이 해산한 2005년이었다.[29]

인터넷

벤 알리 정권은 통신기술부MCT를 이용해 언론을 감시·통제·검열했다. 현지 방송과 신문과 잡지 등은 정치·경제 현안이나 내륙 지역의 끔찍한 가난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30] 이런 상황에서 인터넷이 대안 매체 기능을 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통신기술부는 인터넷의 위험을 과소평가했다. 비록 통신기술부는 1996년에 “국가 안보”에 위험이 된다고 여겨지는 사이트에 대한 접속을 막으려고 튀니지 인터넷국TIA을 설립했지만 소셜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행동의 장이 마련됐다. 사회적 불만과 정권에 대한 적대감의 표출 경로였던 트위터·유튜브·데일리모션, 그리고 특히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는 1월 14일 혁명을 촉발하는 데서 큰 구실을 했다. 이런 온라인 서비스 이용이 청년층에게 미친 영향은 놀라웠다. 특히 페이스북은 벤 알리 정권에게 트로이 목마였다. 소셜 미디어 활동가들(블로거, 랩 가수, 프리랜서 기자, 학생 들)도 튀니지 민중에게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미 깊은 위기에 빠져 있던 정권은 사이버 활동가들의 활약에 위협을 느껴 2011년 1월 6일에서 10일 사이에 블로거와 랩 가수 여러 명을 구속했다.[31]

혁명

튀니지 사회의 피폐화, 자유에 대한 억압, 소셜 미디어는 청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혁명은 시디 부지드 시에서 시작됐다. 시청 단속 요원이 노점상인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뺨을 때리고 수레를 압수한 일이 발단이 됐다. 모욕과 좌절을 느낀 부아지지는 2011년 12월 17일, 자기 몸에 불을 붙였다. 2주 뒤 그는 사망했다.[32] 이에 분노한 시디 부지드 주민들이 시의회와 시장의 정책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부아지지의 죽음이 튀니지의 역사를 바꾼 것이다.

정권은 시디 부지드의 시위를 보면서 2008년 르다이프 지역에서 일어난 비슷한 사태를 떠올렸을 것이다. 경찰은 르다이프 지역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33]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르다이프와 같은 사태가 반복되는 것을 막으려고 벤 알리는 부아지지에게 조의를 표했고 유가족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분노를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시위는 멘젤 부자옌 시로 번졌고 12월 24일 경찰이 발포해 민간인 두 명이 사망했다.[34] 소요 사태가 확대되자 벤 알리는 시위자들을 “한 무리 선동꾼들”로 묘사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폭력”을 잠재우겠다고 다짐했고 부모들에게 “당신 자식들이 선동꾼들에게 조종당하고 있다”고 경고했다.[35]

그러나 벤 알리의 연설은 시위가 탈라 시와 르괴브 시로 전염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두 도시에서 벌어진 사건이 전환점이었다. 1월 8일, 정권은 대대적인 시위 진압에 나섰다. 비무장 민간인들과 특별 경비대 간의 충돌로 탈라와 카세린에서만 50명이 넘는 희생자가 나왔다.[36] 시민들이 찍은 이 날의 발포 장면 동영상은 이후 <알 자지라>와 <프랑스 24> 등을 통해 TV에 방영됐다.[37]

튀니지 남부, 사힐, 나뵐 지역까지 휩쓴 시위 물결은 1월 12일 수도 튀니스에 당도했다. 이미 사망자 수가 크게 늘어난 상태였다. 두즈, 하마메트, 나뵐에서는 저격수들이 민간인들을 사살했다.[38] 튀니스에서는 가난한 인구 밀집 지역인 하이 타다멘에서 시위가 처음 불붙었고, 사상자도 그 지역에서 더 많이 나왔다.[39] 그러자 벤 알리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연설을 했다. 그는 경찰에게 “실탄 사용을 중지하라”고 명령했고 튀니지 국민에게 사과했다.[40] 그러나 질서를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다음날 1월 14일 아침, 수만 명 규모의 시위대가 부르기바 가를 행진한 뒤 고문의 상징인 내무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급기야 시위대가 내무부 담장 위에 올라 경찰과 대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벤 알리 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튀니지 노동연맹

튀니지 노동연맹UGTT은 튀니지 혁명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부아지지의 분신이 전국적 반란을 촉발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아지지 사건만으로는 반란의 요인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듯하다. UGTT는 부르기바 정권 시절에는 강력했지만 벤 알리 정권 하에서는 체계적으로 약화됐다. 1978~85년에는 주로 정부의 “경제 자유화” 정책에 항의하는 데서 상당한 정치적 구실을 했다.[41] 1978년 1월 26일, UGTT는 총파업을 조직했고 “튀니스를 불지르겠다”며 정부를 위협했다. 부르기바는 이에 양보하지 않았고 시위대에 발포하라고 경찰에 명령했다.[42] 역설인 것은, 부르기바는 파업은 허용하면서도 UGTT를 짓밟았지만 벤 알리는 파업이든 UGTT든 모두 억눌렀다는 것이다.

1987년 쿠데타 이후 벤 알리는 UGTT를 제압하고 임금 인상 약속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의제를 내세웠다. 노동연맹 지도부는 부패와 데마고기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1989년 이래 두 명이 UGTT 의장을 지냈는데, 1989년부터 2000년까지 재임한 이스마일 사바니와 2000년부터 현재까지 재임 중인 압데슬렘 제라드가 그들이다. 사바니는 벤 알리 정권을 1백 퍼센트 지지한 인물로, 2000년에 부패 혐의로 의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제라드는 전임자보다 더했다. 그는 2004년과 2009년에 벤 알리의 대선 출마를 지지하는 캠페인을 벌였고, 르다이프 지역 노동 운동가들을 방어하지 않았다. 2008년 12월 정권은 르다이프에서 일어난 시위를 공격해 지도적 활동가인 아드난 하지를 포함한 1백40명을 구속했지만 UGTT는 정권의 탄압을 비난하지 않았다.

이번 혁명에서 UGTT는 벤 알리가 물러나기 6일 전에야 비로소 사태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운동에 동참했다. 1월 8일 UGTT 대변인 아비드 브리키는 지도부가 무조건 시위대를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민간인에 대한 발포를 규탄했다. 브리키의 연설은 벤 알리의 사기를 떨어뜨렸을지는 모르겠지만 시위대에게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 때는 이미 시위 대오가 패배하기에는 너무 단단하고 강력해 보였기 때문이다.[43]

그러나 지도부가 이처럼 일관성이 없었다 해서 몇몇 지역 지부의 구실까지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위가 확산되면서 UGTT 중앙과 지역 지부 사이에는 명백한 분열이 나타났다. 시디 부지드, 부자옌, 르괴브, 탈라, 카세린, 스팍스에서는 UGTT 소속 노조들이 중앙의 방침을 무시하고 시위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들의 참여가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지는 않았다. 지도부가 동요하는 사이 지역 노조들은 시위대와 하나가 됐다. 지난 두 차례 대선에서 벤 알리를 무조건 지지했던 제라드 의장은 이제 모험을 감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브리키의 연설도 그가 보기에 정권이 이미 통제력을 상실한 듯하다고 판단된 시점에 행한 연설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했다.

아래로부터의 변화

사회 혁명은 역사의 광란이다. 튀니지 혁명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아랍 세계에서 정치 혁명이 일어나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래로부터의 반란을 예견한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역사상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흔치 않다. 1791년의 아이티 혁명은 비록 사회 혁명의 성격을 띠긴 했어도 대체로 성직자들과 프랑스 혁명의 이데올로기에 속박돼 있었다. 1871년 파리 코뮌은 미완의 프로젝트였고, 1908년 청년 투르크당 혁명은 풀뿌리 민중의 염원이 표출된 것이라기보다는 당파 싸움에 가까웠다.[44] 이슬람 율법의 이름으로 수행된 1979년 이란 혁명은 이란 사회의 민주주의 염원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 10월 혁명은 프롤레타리아적 요소가 빠져 있었고 무계급 사회를 창출하지 못했다.

튀니지 혁명은 위에서 말한 혁명들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눈에 띄는 지도부가 없다는 것이 튀니지 혁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억압적 정권에 맞선 대중의 자발적 운동이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열망을 표현한다. 벤 알리가 통치한 23년 동안 튀니지에서는 어떤 정치 문화도 발전하지 못했고, 튀니지 사회는 일부분을 제외하면 생활수준과 교육·의료 수준을 높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정권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런 분야의 중요성을 터무니없이 강조했고, 또 이 분야의 중요성을 명분으로 자유를 억눌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튀니지 혁명이 목표가 뚜렷하지 않고 따라서 미래가 없다고 폄하할 수 있을까? 이에 답하려면 그런 혁명이 애당초 왜 분출하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튀니지 혁명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되찾기 위한 혁명이었다는 데 대해서만큼은 공감대가 존재한다. 즉 그것은 빵 문제와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혁명은 사람들이 박탈감과 자기 본질로부터의 괴리감을 느꼈기에 발생했다. 그것은 인간 존엄을 위한 싸움이었다. 그런 점에서 튀니지 혁명은 마르크스주의 용어로도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말이다). 곧, 혁명은 인간이 소외에서, “국가의 존재” 그 자체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45]

벤 알리 정권은 경제 발전, 문맹 퇴치, 국가 안보의 이름으로 튀니지 사회를 노예화했다. 이 대목에서는 정치사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튀니지 식 “허위 의식”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다. 국민과 대통령 사이의 “건설적 상호작용”이라는 허위 의식 말이다. 정치사는 사람들이 사회 현실을 멀리하게 했고 ‘위대한 인물’(벤 알리) 중심의 역사관에 바탕을 둔 정치가 20년 넘게 튀니지를 지배했다. 마르크스가 상기시켜 주듯이, 이런 허위의식은 오직 “사회 혁명”을 “비인간화된 삶에 대한 인간적 항의”로 이해할 때만 극복될 수 있다.[46]

튀니지 민중은 셰비가 말한 “생에 대한 갈망”과 마르크스의 “인간적 본질human essence”을 결합해 개인의 역사적 주체성을 회복했다. 계획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이 변화는 풀뿌리 민중에게서 비롯했다. 어떤 종교적 메시지도, 또는 범아랍주의 의제(온건하든 급진적이든)도 시위를 지배하지 못했다. “우리에겐 삶과 존엄과 자유가 필요하다.” 튀니지 사람들은 바로 이런 보편적 원칙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거리에 나섰던 것이다. 그들이 실탄 사격에 굴하지 않고 요구했던 것은 일자리, 평등, 언론의 자유, 정부를 선출할 권리였다.

의미심장하게도, 튀니지 사회 혁명의 정신은 사람들이 3주 넘도록 외친 구호에서 드러난다. 시기별로 어떤 구호들이 나왔는지를 살펴보자면, 부아지지가 자기 몸을 불살랐을 때 사람들이 처음 외친 구호는 “신은 위대하다”였다. 이는 슬픈 운명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이 충분히 보일 수 있는 반응이다. 부아지지는 무슬림의 관점에서 보면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행동을 했지만 알라(신)는 그를 용서할 것이고, 그를 불쌍히 여겨 그를 자살로 내몬 자들을 응징할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부아지지가 운명한 1월 4일에 “신은 위대하다”라는 구호(이슬람주의와는 거의 무관하다)는 시디 부지드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의 분노에 불을 당겼다. 더 급진적인 구호도 등장했다: “우리의 피와 영혼을 순교자에게 바치자.” 이는 어떤 대의를 위해 희생한 사람과 그를 따라갈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 간의 연대감을 표하는 구호로서, 민중의 적(정권이나 식민 지배 세력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를 상징한다.

1월 8일에 이르러서는 중서부(탈라, 카세린 등지)의 시위가 반란으로 치달았고, 대학생들은 더욱 과감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물과 빵은 오케이, 벤 알리는 노. 그는 죽은 목숨이다!” “자유와 긍지를!” “일자리는 권리다, 이 강도들아!” 이런 구호들은 정권에 분명한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는 독재자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정권이 실탄 사격으로 대응하자 사람들은 더 큰 시위와 더 과감한 구호로 응수했다. 벤 알리는 학생들과 빈민들을 침묵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저격수들의 총탄도 정권을 지켜줄 수는 없었다.

시위 물결이 튀니스에 도달하자 구호는 비타협적이게 됐다. 시위대는 대통령의 퇴진을 분명하게 요구했다. “튀니지는 자유다! 벤 알리는 떠나라!” “민중은 정권 타도를 원한다!” “일어서라, 민중이여! 무찌르자, 정권을!” 이 구호들은 시위가 부르기바 가로 번진 1월 14일까지 이틀 동안 울려 퍼졌다. 마침내 부르기바 가에서 이들이 외친 구호는 짧고도 강력했다. “꺼져라!” “게임은 끝났다!”

튀니지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부분적으로 이렇듯 정권의 사기를 떨어뜨린 구호들 덕분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벤 알리는 1월 13일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연설에서 발포 중지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튀니지뿐 아니라 나머지 아랍 세계에서도 구호는 변화를 촉구하는 사회적 메시지 구실을 했다. 1월 25일에 시작된 이집트의 반란에서도 튀니지와 동일한 구호들이 사용됐다. 이는 언어의 힘이 총탄의 힘을 얼마든지 꺾을 수 있음을 보여 준 사례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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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hebbi, 2009, p111.
[2] NDP 창당과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Bourguiba, 2011을 참조하라.
[3] Bourguiba, 1959.
[4] Bourguiba, 1957.
[5] Girard, 2005.
[6] Bourguiba, 1961.
[7] Bourguiba, 2011.
[8] Ben Ali, 2006.
[9] RCD는 2011년 1월 17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제명됐다.
[10] 벤 알리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친 직후 임시 정부는 RCD의 공식 웹사이트를 차단했다. http://www.letemps.com.tn/pop_article.php?ID_art=18685
[11] 선거 관련 통계는 다음 링크를 참조하시오. www.arabicnews.com/ansub/Daily/Day/.../2004102606; www.allafrica.com/stories/200910260111.html
[12] PCOT의 기관지는 2011년 1월 14일까지 비공개 매체였다. http://albadil.org
[13] Front Line Defenders, 2007.
[14] Comité pour le Respect des libertés et des Droits de l’hommes en Tunisie (CRLDHT), 2008.
[15] Front Line Defenders, 2007.
[16] Front Line Defenders, 2007.
[17] BBC News, 2002. 이 사건에 관한 동영상을 보려면 다음 링크로 들어가시오. http://wn.com/la_tunisie_la_ghriba_de_djerba
[18] CRLDHT, 2008, pp19-25.
[19] Black, 2008.
[20] 고문 사진을 보려면 다음 링크를 참조하시오. http://www.google.com/#sclient=psy&hl=fr&q=radhia+nasraoui&aq=1&aqi=g3g-s1g1&aql=&oq=&pbx=1&fp=c905cbae4d591936
고문으로 죽은 사람 수를 보려면 다음 링크를 참조하시오. http://www.google.com/#hl=fr&xhr=t&q=association++de+lutte+contre+la+torture&cp=39&pf&fp=c905cbae4d591936
[21] Lesme Anthony, 2007.
[22] CRLDHT, 2008.
[23] Vermeulen, 2011.
[24] National Institute of Statistics—Tunisia, 2004.
[25] World Bank Report, 2011.
[26] Beau and Graciet, 2009.
[27] Séréni, 2011.
[28] 트라벨시 일가의 부패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Monnier, 2008과 Deléan, 2008을 참조하시오.
[29] International Freedom of Expression Exchange (IFEX), 2010. 사법부에 대한 공격을 자세히 기술한 문헌은 다음 링크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www.icj.org/IMG/TUNISIA.pdf
[30] 급진적 야권 세력의 신문 가운데 허가 받은 신문은 단 두 개였다. Almawkef (링크: http://www.tunisiemedias.com/ecrite/almawkef.html)와 Attariq Aljadid (링크: www.attariq.org)가 그 둘이었다. 당국은 간혹 둘 다 이런 저런 혐의로 금지하기도 했다.
[31] Langley, 2011.
[32] Reuters, 2011.
[33] Reveiltunisien, 2008.
[34] Al Jazeera English, 2010.
[35] Pan-African News Wire, 2010.
[36] Ibrahem, 2011.
[37] 시위 동영상 리스트는 다음 링크를 참조하시오. http://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kasserine+thala&aq=2 http://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videos+of+tunisians+shot&aq=f
[38] Whitaker, 2011.
[39] Kirkaptrick, 2011.
[40] World Crunch, 2011.
[41] Barrie, 2004.
[42] Com4News, 2008.
[43] Leaders, 2011.
[44] Sukru, 2011을 참조하시오.
[45] Marx, 2000, p135.
[46] Marx, 2000, p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