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29호 2019년 1~4월호)

지난 호

특집2

신자유주의와 대학 구조조정

알렉스 캘리니코스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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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필자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학과 그 구성원들이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는 자신의 25년 넘는 대학 교수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하고도 깊이 있게 이 문제를 파헤친다. 이 글이 특수한 영국 얘기일지라도 그 보편성이 너무도 흥미롭다. 캘리니코스가 분석한 신자유주의적 영국 대학 ‘개혁’의 현실이 한국과 거의 똑같아서 무릎을 치며 빨려들지 않을 수 없다. 올해 한국에서 벌어진 세 사건 — 중앙대 구조조정, 김예슬 선언, 한국의 대학사회가 증오스럽다는 유서를 남긴 어느 대학강사의 자살 — 은 한국의 대학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장이었다. 이 글은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분석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이 글은 먼저, 한국에서도 유행인 ‘지식경제’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캘리니코스는 생산성을 높이려면 고도 기술과 이를 운용할 인적 자원에 투자해야 한다는 경쟁 논리가 대학 운영에 깊숙이 침투한 결과가 무엇인지 면밀하게 추적한다. 이윤 창출에 도움 되는 연구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되고, 대학과 기업은 서로 매력적인 파트너로 여겨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대학 구조조정이다. 정부는 연구 실적을 평가해 기금을 주고, 대학 경영진은 자기 대학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려고 혈안이 된다. 경쟁력 없는 학과와 교수는 퇴출되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더 높은 생산성이 요구된다. 대학은 한층 서열화되고, 대학 교원도 서열화되고, 대학 운영은 더욱 비민주적이 된다. 대학은 점점 CEO가 전권을 행사하는 기업을 닮아간다. 그 다음으로 캘리니코스는 점점 열악해지는 대학 교원·학생들의 처지와 그 변화의 의미도 상세히 다룬다. 이 글에서 묘사하는 대학 교원과 대학생의 처지는 한국과 거의 똑같다. 교수들은 전에는 피고용인 중에서 비교적 특권적 집단이었지만 지금은 소수 교수를 제외한 다수가 고급 자격증을 가진 임금 노동자 처지로 전락하고 있다. 교수 1인당 평균 학생 수와 행정 업무가 늘었고, 단기계약직 교수가 증가했다. 이런 변화 때문에, 전에는 교수협의회를 전문가 단체로 봤던 교수들의 자기 인식이 바뀌고 있다. 그 결과 영국에서 대학노조가 만들어지고 교수들이 쟁의 행위에 돌입한 경험을 캘리니코스는 보여 준다. 한국에서도 국립대 법인화와 사립대 구조조정은 이런 변화를 가속시킬 것이다. 오늘날 대학 교육을 받은 노동자들이 많이 필요하지만, 정부는 교육에 투자하기는커녕 돈을 들이지 않고 대학을 확대하는 정책을 폈다. 그에 따라 대다수 학생들은 공부하기가 더 힘들어졌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알바를 뛰고, 등록금 융자가 쌓여 졸업하면 빚더미에 앉는 현실은 영국이나 한국이나 매한가지다. 이제 다수 대학생들은 대학에서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되는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임시직 노동을 하고 있다. 캘리니코스는 대학생의 사회적 지위 변화에 따른 투쟁 양상의 변화도 보여 준다. 캘리니코스는 저항이 소용 없다는 식으로 대처한 적잖은 교수들이 어떻게 사기저하에 빠졌는지, 이와 대조적으로 프랑스와 그리스 학생들은 어떤 저항 잠재력을 보여 줬는지를 다룬다. 지금 한국에는 두 측면이 모두 존재한다. 어떤 측면을 강화시켜야 할지는 너무 명백하다. 이 글은 대학생, 교수, 강사 등 신자유주의적 대학 개편에 맞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M21 편집자]

번역: 차승일 / 교열·감수: 이수현, 최일붕

서론

영국의 대학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물리적 팽창이다. 2004~05년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은 228만 7천540명이었다.1 요즘 영국에서는 18~19세 인구의 약 30퍼센트가 대학에 진학하는데, 1960년대 초에는 겨우 7퍼센트 정도밖에 안 됐다. 대학 교육은 더는 극소수의 특권이 아니다. 비록 육체노동자 가정 배경을 가진 학생들의 대학 진학은 여전히 매우 힘들지만 말이다.2

일부 사람들은 엘리트주의 관점에서 대학의 팽창에 반대하면서, 극작가 존 오즈번의 구호, 즉 “양이 늘수록 질은 떨어진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우파 칼럼니스트 피터 히친스는 지난번 보수당 내각의 총리 존 메이저가 지금의 대학 팽창을 주도했다며 메이저가 “교육의 질을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비난한다.3 이와 반대로, 신노동당 정부는 대학 팽창이 사회 정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고등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럴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 이것은 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서 핵심적인 기본 원칙이다. 교육은 빈곤과 사회적 약자 처지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좋고 가장 믿을 만한 길이기 때문이다.”4

고등교육 확대는 분명히 고귀한 목표다. 자원만 적절하게 공급된다면 18~30세 인구의 절반 이상에게 대학 교육과 그에 따른 혜택을 제공하는 것을 정부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엘리트주의자들의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그러나 고등교육의 현실은 기회 균등과 사회 정의 운운하는 공식 성명서와는 매우 다르다.

영국의 대학들은 사실 대기업의 필요에 맞는 우선순위에 따라 운영된다. 대학은 국내외 기업들의 수익성 유지에 필요한 학술 연구와 숙련 노동자를 공급할 목적으로 구조조정되고 있다. 그와 동시에, 학문 기관이 아니라 영국 경제를 위해 외화를 벌어들이는 수익 센터로 바뀌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고등교육의 확대 비용이 저렴해야 하므로 학생 1인당 교육 예산은 삭감되고, 개별 대학 간, 학과 간, 교수 간 경쟁이 심해진다. 장학금이 대출로 바뀌고 등록금이 오른 탓에 많은 학생들은 장시간 노동으로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장차 임금 노동자가 될 준비를 해야 한다. 더 가난한 집안 학생들이 대학 진학을 포기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변화는 영국만의 고유한 상황이 아니다. 전 세계 대학들이 비슷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고등교육 구조조정은 훨씬 더 넓은 변화, 말 그대로 글로벌한 경제적·정치적 과정인 신자유주의의 일부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주창한 이후 세계의 거의 모든 정부와 기업과 유력 언론이 받아들인 신자유주의는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을 시장 논리에 종속시키려 하고, 모든 것을 상품(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고 이윤을 위해 사고 파는)으로 만들려고 한다.

급진적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자유주의적 변화가 경제 엘리트들의 권력을 복원하고 재건하는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5 이런 “계급 권력의 복원” 덕택에 이 엘리트들은 막대한 부와 소득을 차지할 수 있었다.

1917~40년 미국 가구의 최상위 1퍼센트가 전체 가계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16.9퍼센트였다. 1973년 그 비중은 8.4퍼센트로 떨어졌지만, 한 세대 동안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후인 2001년에는 19.6퍼센트까지 치솟았다. 반면에, 1970년대와 2002년 사이에 하위 90퍼센트가 전체 가계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퍼센트 하락했다.6 영국에서는 대처 집권기에 소득 불평등이 급격하게 심화했고, 역사적으로 높은 이 수준이 신노동당 정부 때도 계속 유지됐다.7

부와 권력의 이런 변화와 함께, 고등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영역의 광범한 구조조정도 진행됐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교수 등 대학 교원들은[1] 지식 자체를 추구할 기회와 학생들의 필요(교육과 여타의 필요)를 충족시킬 기회를 점점 박탈당했다. 그들의 봉급도 다른 전문직과 비교해 하락해 왔다. 정부는 고등교육의 최고 “소비자”가 학생들이라고 주장하지만 학생 또한 대학이 시장의 우선순위에 종속되는 데 따른 피해자다.

다행히 신자유주의는 고등교육 분야에서 성장하고 있는 저항에 맞닥뜨리고 있다. 2006년 봄 프랑스와 그리스의 대학생들은 대학 교원·직원들과 함께 친시장 정부의 “개혁”을 좌절시켰다. 그 정도로 흥미진진하지는 않았지만, 영국의 대학 교원들도 봉급 인상을 요구하며 3개월 동안 시험을 거부했다. 이런 투쟁은 시애틀과 제노바 시위에서 시작한 국제적 반신자유주의 저항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좌절시키고 다른 논리로 대체하려면 훨씬 더 큰 사회운동이 필요하다. 이 글은 적의 본질을 밝히고 어떻게 맞서 싸울지를 설명하면서, 이런 운동들을 도울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할 것이다. 이 글은 객관적 사실과 수치뿐 아니라, 내가 25년 넘도록 영국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경험하고 목격한 변화들을 바탕으로 썼다.

그러나 내가 이런 변화를 비판하는 이유는 이상화된 과거를 향한 노스탤지어 때문이 아니다. 나는 훨씬 더 작고 훨씬 더 특권적이었던 과거의 대학 체제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고등교육에서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아 실현의 기회를 평등하게 누리는 사회를 건설하는 투쟁의 일부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분석한 이론적 틀을 사용했다. 신자유주의는 결국 자본의 논리를 특별히 순수한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더 나은 대학을 위한 투쟁은 세계 자본주의 자체에 맞선 운동과 분리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와 “지식경제”

영국 대학들이 지금처럼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79~97년 보수당 정부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고등교육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훨씬 더 전폭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신노동당이었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토니 블레어[1997년에 들어선 노동당 정부 총리 — M21] 개인의 강력한 의지를 반영했다. 블레어는 심지어 마거릿 대처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 일부 공공부문을 사유화하고 상품화하는 정책을 강행했다. 그러나 그것은 신노동당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에서 교육이 핵심적 구실을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서 핵심 사상은 “지식경제”라는 것이다. 블레어 정부의 아주 초기에 나온 정책 문서 중 하나는 《우리의 미래 경쟁력: 지식 주도 경제 건설》(1998)이라는 제목의 통상산업부 백서인데, 이는 피터 맨덜슨이 수치스럽고도 짧았던 통상산업부 장관 재직 시절[맨덜슨은 주택 구입 비리 때문에 사임했다 — M21]에 발행한 것이다. 토니 블레어의 자문을 지낸 찰스 레드비터는 현재 세계경제를 좌우하는 주요 동력 중 하나가 “지식 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

“지식 자본주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 그것을 고객이 원하는 상업용 재화와 서비스로 만드는 드라이브다.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이용하는 이 과정이 생활수준 향상과 경제성장의 이면에 놓인 동역학이다. 그것은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해 우리가 모두 소비자이자 노동자로서 연결돼 있음을 보여 준다. 세계경제에 등을 돌린다면 우리는 지식경제라는 엄청난 창조적 힘도 잃게 될 것이다.8

사실, 지식경제론은 오늘날 전 세계의 정치 엘리트와 기업 엘리트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상식이 됐다. 그 사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주장을 함축한다.

● 물질적 재화 생산이 비물질적 서비스 생산으로 바뀌었다.

● 부분적 결과로, 생산이 더욱 “지식 집약적”으로 바뀌고 있다. 즉, 상품은 점점 더 복잡해지는 제조 기술 덕분에, 또 제품에 반영되고 제품 광고에 사용되는 아이디어 덕분에 판매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은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들의 연구에 의존한다.

● 그러므로 기업과 국민 경제의 성공은 구축하는 데 몇 년, 몇십 년, 심지어 더 오래 걸리기도 하는 물리적 공장이나 설비가 아니라 “인적 자본”, 즉 노동인구의 기술과 지식과 상상력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 이런 기술들을 사용해 세계 시장이 원하는 바를 성공적으로 공급할 수 있어야 개인과 기업과 나라 전체의 번영이 가능하다.

이런 생각들은 특히 1990년대 말 이른바 “닷컴 열풍”의 시기에 유행했다. 미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 그리고 IT를 기반으로 한 “신경제”에 대한 장밋빛 낙관이 부추긴 주가 폭등 덕분에 세계 자본주의가 영원히 번영하리라는 생각이 힘을 얻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미국도 경제 위기의 타격을 입었는데도 지식경제를 향한 낙관은 지속됐다. 예를 들어,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최근에 크게 주목받은 《세계는 평평하다》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2000년에 세계화의 “완전한 새 시대”가 열렸고, 새 시대의 “원동력은 개인들이 국제적으로 협력하고 경쟁하는 새로운 능력”인데, “우리를 모두 이웃사촌이 되게 한 국제적 광통신망과 소프트웨어(갖가지 새 응용프로그램들)” 덕분에 그럴 수 있게 됐다고 주장한다.9

내가 이 글을 쓴 주된 목적은 레드비터나 프리드먼 같은 이데올로그들이 세계 자본주의를 장밋빛으로 묘사한 것을 비판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런 비판은 이미 다른 곳에서 했기 때문이다.10 그럼에도 지식경제론에 관해 몇 가지 지적할 필요는 있겠다. 우선, 서비스 전환론은 매우 조심해서 봐야 한다. 최근 가장 잘 팔리는 상품 중에는 예컨대 휴대전화와 MP3 플레이어 같은 새로운 물질적 재화들이 있다.

둘째, 성공적인 경제들은 여전히 제조업 상품을 생산하고 수출해서 번창하는 경제인 경우가 흔하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가 독일에 관해 보도한 것을 보라. “서로 연결된 세계경제가 제공하는 기회를 독일보다 더 잘 활용한 선진 공업국은 없다. 흔히 화를 잘 내고 변화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모험을 싫어한다고 평가되는 인구 8천만의 이 중간 규모 경제는 2003년에 미국을 추월한 이후 해마다 세계 최대의 상품 수출국 자리를 지켰다.”11 독일은 주로 복잡한 부품을 국제 생산 네트워크에 공급하는 지위를 잘 유지한 덕분에 잘 나가는 수출국이 될 수 있었다. 중국이 국제 생산 네트워크에서 완제품 조립자 구실을 하게 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수출을 잘 한다고 해서 반드시 고용 안정이나 번영이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독일은 만성적 실업에 시달리고 있는데, 최근에는 전체 노동인구의 10퍼센트가 실업자다. 더 놀랍게도,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따르면 아시아도 실업률이 증가하는 위기를 겪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아시아개발은행 수석경제연구원 이프잘 알리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비교적 성장률이 높은 나라들에서조차 일자리 창출 속도가 느려서 이 지역의 전체 노동인구 17억 명 가운데 5억 명이 실업이나 불안정 고용 상태에 있다. 앞으로 10년 동안 2억 4천5백만 명이 추가로 노동시장에 진입할 것이다. …
홍콩·한국·싱가포르 등 신흥 공업국들에서 기술 수준과 임금 수준이 높은 “좋은 일자리”가 많이 창출된 반면, 다른 곳, 특히 남아시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비록 지난 20년 동안 이 지역에서 빈곤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아시아인 19억 명 가량이 하루 생활비가 2달러도 안 되고, 일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찾더라도 매우 적게 번다고 아시아개발은행은 전했다.
아시아개발은행은 중국과 인도와 러시아가 세계경제에 점점 더 깊숙이 통합됨으로 말미암아 “국제적으로 노동력 공급 과잉이 엄청났고” 이는 “흔히 이데올로기적 집착”을 동반한 기업들의 경쟁력 추구 때문에 “바닥을 향한 질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알리 씨는 “생존을 위해서는 수준 이하의 임금을 받으면서도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실업자와 불안정 고용 근로자라는 수많은 ‘예비군’이 압력으로 작용하면서 아시아의 성공은 조만간 퇴색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에서는 일자리를 창출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이 계산한 것을 보면, 1980년대에는 중국 경제가 3퍼센트 성장하면 고용이 1퍼센트 늘었는데, 1990년대에는 고용을 1퍼센트 늘리려면 경제가 8퍼센트 성장해야 했다.
생산이 더 자본집약적이고 근로자들이 고용 계약상 근로조건도 괜찮고 더 안정적인 일자리라고 생각하는 공식 부문의 고용 증가율이 특히 실망스럽다.12

따라서 경제 상황이 좋을 때조차 자본주의 성공의 척도인 경쟁력·이윤율과 노동자·빈민의 복리 사이에는 필연적 연관이 없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숙련 노동자도 필요하지만, 수많은 저임금 노동자, 많은 불안정 고용 노동자, 약간의 불법 이주노동자에도 의존한다. 이 점은 남반구뿐 아니라 북반구의 부유한 경제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식경제” 이데올로그들이 간과하는 더 커다란 불확실성이 있다. 기업과 전체 경제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들은 이들의 활동과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연관이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1990년대 말의 신경제 호황 때 IT와 통신 산업에서는 수익률에 대한 현실적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막대한 투자 붐이 일었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광케이블이 약 6천2백만 킬로미터나 깔렸는데, 이는 지구를 1천5백66번 감을 수 있는 길이였다.13

이런 과잉투자는 결국, 파산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아주 흔한 일이었다. 오늘날 많은 IT·통신 기업들은 여전히 이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고자 분투하고 있는 반면, 흔히 “구경제”라고 부르는 기업들, 특히 석유·천연가스·철강·광산 관련 기업들이 최근 국제 원자재 수요 증대에 따른 가격 상승의 혜택을 누리며 번창하고 있다. 이런 기업들은 지식경제론에 잘 맞지 않는다. 그러나 10년 전의 상황은 정반대였고, 그래서 지식경제론이 처음 대두될 수 있었다. 이는 자본주의가 경쟁이라는 맹목적 과정, 즉 그 결과를 통제할 수도 없고 (자세히) 예측할 수도 없는 맹목적 과정에 의해 추동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지식경제론자들뿐 아니라, 자기 대학을 “세계 명문” 따위로 만들겠다고 외치는 대학 부총장들도[2] 간과하는 경쟁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 경쟁에는 승자도 있고 패자도 있다는 점이다. 모든 대학이 “세계 명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패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기업 간 경쟁에서 패자는 다른 기업에 인수되거나 퇴출되고 그 기업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기도 한다. 대학 간 경쟁에서는 패배하더라도 (아직은)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끌어모을 수 있는 자원이 줄어들어 교원과 학생 들의 처지가 열악해진다.

지식경제 이데올로기는 현실의 극히 일부와 장밋빛 그림만 보여 주기는 하지만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세계 자본주의의 현 시대는 격렬한 국제 경쟁의 시대라는 점이다. 개별 기업들은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여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압박을 계속 받는다. 하루는 24시간으로 제한돼 있으므로, 생산성을 높이려면 더 발전된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 그래서 연구·개발에 투자해야 하고, 새로운 기술을 기획하고 운용할 고숙련 노동자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데 투자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쟁 논리는 경제 전체에도 적용돼서 각국은 자국 경제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경쟁국의 그것과 항상 비교한다. 아시아의 저비용 신흥 경제 대국인 인도와 중국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업주와 노동자 들은 모두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압박을 계속 받는다. 고등교육의 신자유주의화 때문에 이 경쟁 논리가 대학의 운영 방식에도 깊숙이 내면화됐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신자유주의 덕분에 대학은 증가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점차 사활적으로 중요해지는 연구를 최대한 저렴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이윤을 위해 지식을 이용하기

신노동당 정부의 위선은 유명하지만, 고등교육과 관련한 자신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솔직하게 드러냈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할 듯하다. 고든 브라운이[3] 장관인 재무부가 작성한 중요한 정책 문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혁신을 이용하는 것이 영국의 국부 창출 전망을 개선하는 열쇠다. 다가오는 10년 동안 영국 경제가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고용을 늘리면서 성장하려면, 과거보다 더 강력하게 지식 기반에 투자하고 이 지식으로 기업과 공공 서비스를 더 효율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정부가 민간 부문과 비영리 부문의 파트너들과 공유하는 야심찬 목표는 영국을 세계경제의 핵심적 지식 허브로 만들어 탁월한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할 뿐 아니라, 그런 지식을 새로운 재화와 서비스로 만드는 세계적 리더가 되는 것이다.14

재무부는 공공부문 중심의 연구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이런 연구가 연구 자체에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연구 기반이 경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전하는 경제적 필요와 연구 기반의 통합을 강화해서 기업의 R&D[연구·개발] 증대와 혁신을 지원해야 한다. 그러려면 중규모 기업들이 R&D 집중도를 자기 업계에서 최고 수준으로 높이도록 지원하고, 다국적기업들이 영국에 투자하도록 고무하고, 새로운 기업의 설립과 급속한 성장을 통해 새로운 기술기반 부문을 육성해야 한다.15

대학은 가장 중요한 “연구 기반”이므로, “발전하는 경제적 필요”에 더 단단히 종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표는 2003년 당시 교육부 장관 찰스 클라크가 분명하게 표현했는데, 그는 자신의 세 가지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가 “부의 창출에 지식을 더 잘 이용하는 것”이라고 했다.16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고든 브라운은, <파이낸셜 타임스> 편집국장 출신으로 현 영국산업연맹CBI[영국판 전경련 — M21] 사무총장인 리처드 램버트에게 대학과 기업의 관계 증진 방안을 마련토록 했다. 고든 브라운은 다른 선진 자본주의 경제보다 만성적으로 낮은 영국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려고 이런 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램버트는 생산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인 R&D 투자가 다른 나라보다 하락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1981년 영국의 전체 R&D 지출은 선진 7개국G7 중에서 독일 다음으로 높았다. 1999년에는 독일·미국·프랑스·일본보다 뒤처지고 있었고, 겨우 캐나다와 비슷했을 뿐이다.” 게다가 영국의 R&D 투자는 극소수 부문, 특히 제약·생명공학·국방·항공에 집중됐고, “다른 주요 부문 모두에서, 특히 전기·전자, 화학, 공학, 소프트웨어·IT서비스에서 [세계 평균보다] 더 낮다.”17

이런 패턴은 영국 자본주의의 일반적 특징, 즉 한 세기가 넘도록 제조업 부문 투자 부족이라는 만성적 문제에 시달려 왔다는 점을 반영한다. R&D가 집중된 분야는 영국에 기반을 둔, 아직은 비교적 견실한 산업체들이다. 그러나 램버트는 경고한다. “이제 이런 기업들은 모두 국제적 기업이 됐고, 영국과의 문화적·지적 연계는 10년 전보다 약해졌다.” 그래서 이 기업들은 점차 R&D를 영국 외부로 이전할 수 있었는데, 다국적기업들은 활동 무대를 그들의 핵심 시장 근처로 옮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18

한편 램버트는 R&D 수행 방식이 전적으로 변했다고 지적한다. 20세기 초 대기업들은 스스로 연구소를 두고 연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독일 화학 산업과 미국의 벨 연구소 등이 그런 사례였다. 그러나 이제 이런 상황은 변하고 있다. 요즘은 제품이 너무 복잡해져서 한 기업이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아주 다양한 기술을 연구해야 한다. 격심한 경쟁으로 심지어 가장 큰 기업들도 “핵심” 사업에 집중하면서 비용을 절감해야 하고, 자체 연구소를 축소하거나 심지어 폐쇄해야 했다. 결국 개별 연구자들은 이곳저곳을 전전하거나 벤처 자금을 조달해 스스로 소규모 기업을 차리기도 했다.

그러나 R&D는 생산성과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데 여전히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램버트는 기업들이 소홀히 하는 일을 맡는 것이 대학과 국가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변하는 상황에서 대학은 기업에게 매우 매력적인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뛰어난 대학 연구자들은 국제적 네트워크에 속해 있다. 그들은 자기 분야 첨단 기술의 국제적 흐름을 안다. 기업 연구소나 공공 연구소와 달리 대학 연구소들은 학부생, 대학원생, 교원의 형태로 똑똑한 연구자들이 새로 유입되면서 끊임없이 활력을 얻는다.19

미국의 경영학자 헨리 체스브로가 말하듯이,

[기업] 연구소들의 방향이 기초 연구에서 멀어진 상황을 감안하면, 1960년대 이래로 이 연구소들이 확산시켰던 수많은 혁신이 앞으로 되풀이되기는 힘들 듯하다. 그러므로 앞으로 20년 동안의 혁신을 창출할 씨앗은 사회의 다른 곳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정부와 대학이 이 불균형 문제를 다뤄야 할 것이다. 대학은 갈수록 기초 연구의 중심지가 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업은 적절한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상업화한 대학과 협력해서, 이런 연구 성과들을 반영하는 혁신적 제품을 생산해야 할 것이다.20

덧붙여 램버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런 변화가 특히 영국에 중요한 이유는 대학의 연구 실적은 국제 경쟁에서 우위에 있지만 기업의 연구 실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잘만 된다면, 영국 기업들은 이 새로운 파트너십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할 중요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21 다양한 국제적 성과 지표를 보면, 영국의 대학들은 대체로 세계 2~3위(미국 대학들이 계속해서 1위를 차지한다)인 반면 영국 기업들의 국제적 수준은 그보다 떨어진다.22 따라서 대학이 나서서 기업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주장에는 얼마간 모순이 있다. 신자유주의에서는 사기업이 최고다. 이런 핑계를 대면서 신노동당은 보건·교육 서비스의 대규모 사유화를 강행하고 있다. 그런데 경쟁력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R&D 문제에서 사기업들은 가장 중요한 장기 투자를 기꺼이 줄인다. 대학과 대학을 후원하는 국가가 그런 장기 투자를 떠맡으리라는 예상에서 말이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국가는 자신이 주요 구실을 하는 경제가 건강해야 활동에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를 운영하는 자들은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업들의 수익성과 성장을 촉진해야 할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에 실패하면 기업들은 국가를 벌주는데, 예를 들면 자본을 다른 나라로 빼돌려서 국가의 차입 비용을 높이고 환율을 떨어뜨린다.

블레어와 브라운의 노동당 정부는 이런 자본 유출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되고 대기업들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전에도 그랬듯이 여기에는 자본가 전체에게 이익이 되지만 개별 자본가에게는 비용 부담이 너무 큰 일을 국가가 수행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상반기에 국가가 노동 능률과 순종을 위해 노동자와 그 자녀들의 건강을 유지하고 그들을 잘 교육한 이유였다.

보수당과 신노동당 정권에서 국가는 구조조정됐다. 복지 혜택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되도록 삭감되고 사유화됐고, 국가의 억압 기구인 군대·경찰·감옥·보안경찰이 강화됐고, 물자가 사기업들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로 흘러갔다. 고등교육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정부는 영국의 전체 R&D 투자를 2002년 GDP 대비 1.86퍼센트에서 2014년 2.5퍼센트 수준으로 높이려 한다. 이를 위해 공공 연구 지출을 2004~05년과 2007~08년 사이에 5.8퍼센트(물가 상승률을 뺀 수치) 늘릴 것이다.23

그러나 이 돈은 대학들이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연구 일체에 지급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앞에서 이미 살펴봤듯이 정부의 목표는 “부를 창출하는 데 지식을 이용하는 것”, 즉 경쟁과 이윤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레드비터는 훨씬 더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대학은 교육과 연구의 중심이 돼야 할 뿐 아니라, 지역 경제 내부의 혁신 네트워크 중추가 돼서, 예컨대 대학의 자회사 등을 설립해야 한다. 대학은 지식의 노천광露天鑛[4] 돼야 한다.”24 이는 흥미로운 비유인데, 왜냐하면 노천광은 환경 파괴와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악명 높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악화 과정은 이미 영국 대학들에서 상당히 진척됐다.

이 모든 것에는 역사적 아이러니가 있다. 1960년대의 급진 학생들은 대학이 특권층의 상아탑이 되는 데 반대하며 대학의 교육·연구 성과가 사회 전체와 연계돼야 한다고 요구했다.25 오늘날 보수당과 신노동당도 하나같이 “연계”라는 말을 사용한다. 보수당과 신노동당도 학자들의 상아탑에는 반대하지만 우선순위는 사뭇 다르다. 1960년대의 학생운동은 대학을 자본주의에서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개조하고자 했다. 오늘날 정부와 기업들은 대학을 자본주의에 구조적으로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개조하고자 한다.

노천광처럼 되는 대학

영국에서 고등교육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20년 넘게 진행됐다. 대처 정부의 비용절감 조처가 그 시작이었다. 대학에 대한 지출 억제는 공공 지출을 삭감하려는 보수당의 광범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메이저와 블레어 정부에서 강조점은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 대학을 확대하는 정책으로 옮겨갔다.

이는 교육 관료들이 “자원 단위unit of resource”라고 부르는 것, 즉 학생 1인당 교육 예산액이 계속 감소한 상황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그동안 대학 노동자들은 늘어나는 학생들에게 교육과 그 밖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생산성을 더 높여야 했다. 30년 전에 대학 교원 한 명은 평균적으로 학생 9명을 가르쳤는데, 이제는 21명을 가르치므로 생산성은 1백50퍼센트 증가한 셈이다.26 특히 신설 대학교(1992년 폴리테크닉과 칼리지가[5] 종합대학으로 승격됐다)에서 이런 부담은 평균치보다 훨씬 큰데, 특히 1학년 학생들은 5~6백 명짜리 강의를 듣는다.

교수 봉급도 상대적으로 하락했다. 1981~2001년 비육체직 종사자의 실질 평균 소득은 57.6퍼센트 상승했다. 같은 기간에 기존 대학교 조교수급 교수들의 실질 봉급은 6.1퍼센트, 신설 대학의 부교수급 6호봉 교수들의 실질 봉급은 7.6퍼센트 상승했다. 2003년 4월까지 10년 동안 대학 교수의 실질 소득은 평균 6.6퍼센트 상승한 반면, 회계사의 실질 소득은 12.1퍼센트, 중등 학교 교사는 12.3퍼센트, 의사는 26.6퍼센트, 경영자와 고위 공무원은 31.6퍼센트 상승했다.27

대학 교수들을 쥐어짜내서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다른 형태로도 나타났다.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가 연구실적평가RAE, Research Assessment Exercise로, 이는 1986년 보수당 정부가 처음 도입한 것이다. 연구실적평가는 다소 부정기적으로 시행되고(2001년에 마지막으로 시행됐고 다음 평가는 2008년에 끝난다), 전국의 모든 대학 학과와 기관들의 연구 성과를 평가해 등급을 매긴다.

학과와 기관의 순위에 따라 잉글랜드 고등교육재정지원위원회HEFCE 같은 지역별 대학 재정 지원 기구들이 각 대학에 이른바 “등급별QR, quality-related” 연구 기금을 할당한다.(고등교육에는 약어와 우스꽝스러운 관료적 용어가 너무 많다.) 등급별 연구 기금은 대학 연구 자금의 가장 큰 원천이고 대학들이 단순 교육 기관을 넘어서는 기능을 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정부의 대학 연구 “이중 지원” 시스템의 또 다른 한 축은 국가 재정으로 운영되는 연구위원회가 특정 프로젝트에 연구비를 지급하는 제도다.)

연구실적평가에는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매우 많이 반영돼 있다. 교수들은 강의는 물론이고 연구를 위해서도 채용된다.(교수 봉급의 5분의 2는 명목상 연구 활동비다.) 그러면 교수들의 생산성은 어떻게 측정하는가? 산업에 비유하면 측정 가능한 물리적 생산물이 필요하다. 교수가 내놓는 가장 가시적인 “생산물”은 출판물이다. 그러나 단순히 책과 논문 수를 세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 곧 분명해졌는데, 형편없는 글을 많이 쓰는 것은 꽤나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실적평가는 점차 동료 평가 과정, 즉 다른 과 교수들로 구성된 패널과 서브패널들이 자기 동료의 논문을 심사하는 과정이 됐다. 교수들은 여전히 “연구 결과 목록”을 네 개씩 제출해야 하는데, 이것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소위 “권위 있는high-rated” 학술지(대체로 미국에서 발행되는)에 등재된 것이냐 아니냐다.

연구실적평가는 점점 비용과 시간을 잡아먹는 매우 불합리한 과정이 됐다. 예를 들어, 대학들은 “비생산적인” 교수들을 명부에 올리지 않는 등 다양한 변칙을 써 대학 순위에서 밀리지 않는 방법들을 찾아냈다. 그래서 일부 교원들은 “강의만 하는” 계약을 맺고 연구실적평가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측면에서 연구실적평가는 옛 소련의 관료적 명령 경제의 불합리성을 닮았다. 막대한 대학 예산이 연구실적평가 순위에 달려 있으므로, 대학들은 제출 서류나 논문을 조작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스탈린 체제의 기업 경영진들이 중앙 정부의 계획자들을 속이려 했듯이 말이다.

연구실적평가의 부담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자(2008년까지 4천5백만 파운드의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된다) 2006년 3월 고든 브라운은 기존의 동료 평가 제도를 폐지하고 “수치”(즉, 연구 기관들이 연구위원회한테서 받는 연구비 같은 계량적 목표)를 바탕으로 등급별 연구 기금을 할당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단순화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발표했다.28

그리 되면 기존 시스템의 불합리함이 더 심화할 것이다. 즉, 연구위원회의 자금을 많이 받지 못하는 인문학이 특히 심하게 고통받을 것이다. 연구실적평가는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가 실제로는 정부의 대학 통제 강화를 어떻게 정당화하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다. 대학 강의도 교육표준국Ofsted과 비슷한 노릇을 하는 우수성보증국QAA, Quality Assurance Agency의 평가를 받는다.

연구실적평가는 이미 영국 고등교육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많은 점에서 부정적으로 말이다. 평가는 점점 협소해져서 개별 교수들의 성과에 맞춰졌다. 예를 들어 2008년 평가에서는 모든 사람의 연구 결과가 다음의 기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질 것이다. “별 4개: 세계 최고 수준 … 별 3개: 국제적으로 탁월한 수준 … 별 2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수준 … 별 1개: 국내에서 인정받는 수준 … 등급 외[: 쓰레기 수준].”29 등급이 너무 낮으면 매우 큰 대가를 치러야 하므로 대학들은 되도록 많은 교수들이 상위 등급을 받게 하려고 다그칠 것이고, 대학의 지구적(왜 은하계라고 안 하고?) 위상을 터무니없이 부풀리려 할 것이다.

연구실적평가는 대학 내부에 경쟁 논리를 내면화하는 핵심 메커니즘이 됐다. 교수들은 자신의 이력이 연구실적평가를 얼마나 잘 받는지에 달려 있다는 점을 안다. 그래서 교수들은 학생을 가르치거나 동료 교수들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집중해야 한다는 유혹을 강하게 받는다. 교수들은 연구 지원비를 타내 강의와 행정 업무의 짐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연구비를 타내면 그들이 맡던 강의는 기간제 교원이나 대학원생 조교가 맡게 된다.

이는 대학의 위계적 성격을 더욱 굳히는 압력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스타 교수 시스템이다. 대학들은 자신의 연구실적평가 등급을 올리고자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고급 연구자를 초빙하려고 서로 경쟁한다. 이런 스타 교수들은 특별 대우를 받는다. 봉급은 매우 높고 강의와 행정 업무는 거의 또는 아예 안 한다. 그 결과는 서열화다. 즉, 상층에는 거물급 유력 교수들의 프리미어 리그가 있고, 중간에는 급여도 적고 초과근무를 하는 다수의 “평범한” 교수들이 있고, 밑바닥에는 그 수가 늘고 있는 기간제 교원들(많은 사람들이 단기계약을 맺거나 시급을 받으면서 박사 과정을 마치려고 애쓰는 연구생들이다)이 있다.

서열화는 교수들뿐 아니라 대학들 사이에서도 굳어지고 있다. 램버트는 2000~01년에 대학 15곳이 세 가지 주요 연구 기금(잉글랜드 고등교육재정지원위원회의 등급별 연구 기금, 연구위원회의 보조금, 기업들의 연구 지원비와 외주)의 60~68퍼센트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그 중 다음 열 곳은 세 가지 기금을 모두 받았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임페리얼칼리지, 킹스칼리지 런던, 맨체스터, 버밍엄, 리즈, 셰필드, 사우샘프턴.30

연구비를 많이 받지 못하는 대학들을 어쩔 수 없이 강의에 집중해야 한다. 이런 분업은 현재 체제에서는 불가피하다. 비교적 소수의 대학이 연구비의 알짜를 차지하면, 나머지 대학(과 “일류” 대학의 시간제 교원들)이 엄청나게 늘어난 학생들을 가르치는 부담을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영국의 대학 체계는 언제나 옥스브리지[6]를 정점으로 한 서열을 반영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부 정책 탓에, 특히 연구실적평가 탓에 이런 서열이 강화되고 재편되고 있다. 2001년 연구실적평가 결과에 따라 대학들은 1부터 5*까지 등급이 매겨졌는데, 5*이 최고점이었다. 그 후 정부는 6*(전에 5*에 해당하는 등급)을 최고점으로 하는 새로운 등급을 개발했고, 6* 등급이 받는 연구비는 실질 기준으로 금액이 더 늘었다. 5* 등급이 받는 돈은 물가 인상을 반영하면 동일했고, 나머지는 모두 실질 금액이 줄었다! 정부는 사실상 골대를 옮긴 것이다. 당시 평생·고등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마거릿 호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첫째로 세계 수준의 대학들에, 둘째로 상향 추세에 있는 대학들에 자금을 집중하고자 한다.”31

5*

33,634파운드(현역 연구자 한 명당)

6곳

5

26,579파운드

16곳

4

8,520파운드

10곳

4 미만

없음

12곳

영국 철학협회의 연구 결과를 보면 연구비가 어떤 식으로 집중됐는지를 알 수 있다. 2006~07년 철학과들 사이에서 등급별 연구 기금 1천만 파운드가 위과 같이 배분됐다.

정부 백서인 《고등교육의 미래》는 이런 식으로 연구비를 집중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국제적으로 비교해 보면, 독일·네덜란드·미국(연구와 석·박사 학위 수여가 “4년제” 대학 1천6백 곳 가운데 2백 곳에 집중된 나라) 같은 나라들은 비교적 적은 대학들에 연구를 집중한다. 이와 비슷하게 중국 정부도 세계 정상급 대학 열 곳을 세워 여기에 연구비를 집중하려는 계획이 있고, 인도에는 국립기술연구원National Institute of Technology이 전국 다섯 곳에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우리가 연구를 조직하는 방식을 재고해야 하며 세계 최고의 대학들과 경쟁할 수 있는 연구 기관을 많이 보유해야 함을 알 수 있다.32

언제나 그렇듯이, 국제 경쟁이라는 위협, 무엇보다 중국과 인도의 위협이 구조조정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다. 연구비 집중 정책의 논리는 대학 시스템을 미국처럼, 즉 꼭대기에는 “세계 최상급 대학”들이 있고, 비교적 많은 대학은 연구도 조금 하지만 주로 강의를 하고, 밑바닥에는 노동계급 가정의 가난한 학생들에게 기초적인 직업 교육을 하는 커뮤니티칼리지 같은 대학들이 있는 구조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런 대학 서열화는 이미 학교 교육에 만연해 있는 계급 간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그 결과, 영국 대학에서 강의는 연구보다 뒷전으로 밀린다. 대학이든 개인이든 성공과 보상은 연구 실적과 연계된다. 이는 현재 매우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 즉 학생들을 강의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소비자로 취급하는 이데올로기와 모순되는 듯하지만, 지난 20년 넘게 추진된 고등교육 구조조정의 필연적 결과다. 이런 소비자 이데올로기가 정당화하는 우수성보증국 평가는 정부가 대학을 통제하는 또 다른 메커니즘일 뿐, 대학 시스템의 근본적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대학의 교육과정이 점점 더 모듈화[7]하면서 강의의 우선순위는 더욱 낮아졌다. 모듈화 때문에 교육과정이 획일화·세분화하고 과정 간 이동이 쉬워져서, 좋게 보면 학생들은 자신의 학부 과정을 마음대로 고르고 혼합해서 편성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런 변화의 주요 피해자다. 이런 변화 탓에 최악의 경우에는 학부에서 하는 학업의 학문적 일관성이 심각하게 손상되기 때문이다. 특히 중세부터 이어져 온 3분기제가[8] 미국처럼 15주짜리 한 학기제로 바뀌면서 학생들이 입는 피해는 더 커졌다. 이런 학기제에서는 학생들의 실제 수업 시간이 줄어들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의 또 다른 함의는 “연구 대학”이 되지 못하는 데 따르는 대가가 매우 크다는 것이다. 연구비를 필요한 만큼 받지 못하는 대학은 상대적 경쟁력이 더 떨어지기 마련이다. 초기의 추세나 약점이 결국은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즉, 신입생이 줄어들고, 연구비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고, 교원들은 사기 저하하고, 결국에는 “강의 전문” 대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학 경영진은 자기 대학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최대한 높이고자 한다. 몇 년 전에 나는 원로 교수들의 모임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총리 고문이 영국은 미국의 최고 대학들과 경쟁할 수 있는 “세계 정상급” 대학 6곳만 지원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런 얘기는 “연구 중심” 대학 19곳의 모임인 러셀 그룹의 대학 부총장들을 살 떨리게 하는데, 각 대학이 지원 대상에 포함되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열망 때문에 고등교육에 경쟁 논리가 더 깊숙이 침투하게 된다.

경쟁 논리는 다른 영역에서도 작동한다. 해외 유학생들(유럽연합 외부에서 유입되는 학생)이 내는 고액의 수업료를 보면 대학들이 왜 유학생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려는지를 알 수 있다. 해외 유학생들의 수업료는 자금난에 시달리는 대학들의 핵심 수입원이다. 2004~05년 영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은 21만 7천 명이었는데, 대다수는 중국(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미국, 인도, 말레이시아, 홍콩 출신이었다.33 런던정경대학LSE, London School of Economics과 아시아아프리카학대학SOAS,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이 전체 수입의 3분의 1을 해외 유학생 수업료로 충당하는 상황은 이례적이지만, 연구비를 많이 받지 못하는 많은 신설 대학들도 해외 학생을 유치하는 데 그동안 매우 적극적이었다.34 그런데 영국 대학들은 해외 유학생을 유치하는 데서 다른 나라, 특히 영어 사용국인 미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의 대학들과 국제적으로 경쟁하고 있다.

따라서 영국의 대학들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힘에 크게 의존한다. 예컨대, 정부의 비자 정책 변화(2001년 9월 11일 뒤에 주요 문제가 됐다), 국제적 경제 위기(예를 들어, 1990년대 말 동아시아를 강타한 위기), 해외 유학생의 주요 공급국인 중국 같은 나라들의 더 탄탄한 대학 체계 구축 등이 그렇다. 대학들이 국제 유학생 시장에 의존할수록 시장 변동에 더욱 취약해진다.

경쟁 논리는 중앙집권적 경영을 수반한다. 경쟁력이 없는 학과와 교원들을 퇴출하고 나머지에게 더 높은 생산성을 요구하는 일은 민주적 논쟁과 의사 결정 과정으로는 쉽게 이룰 수 없다. 필요한 정책을 노동자들에게 강제한 대가로 상당한 보상을 받는 최고 경영진의 손에 권력이 집중돼야 한다. 영국 대학들에서 이런 과정은 꽤나 진척돼 있다.

영국의 대학에는 교수 간 협조 체제가 매우 강하다는 전통적 특징이 있다. 이는 대학을 학자들의 공동체로 여기던 중세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이를 그리워할 이유는 없다. 교수들이 집단으로 대학을 운영한다는 생각은 가장 특권적인 대학, 즉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강하다. 거기가 학벌주의, 무사안일주의, 술주정도 가장 심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수 간 협조 체제가 강하면 교수들의 업무 자율성도 상당히 크다.

이제 현실은 많이 바뀌었다. 신자유주의적 대학 구조조정으로 말미암아 교수들 사이의 권력이 재분배됐다. 분명한 엘리트 경영진이 나타나 새로운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들 중 일부는 원로 교수들이고, 나머지는 공공부문이나 사기업에서 스카우트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파워포인트 발표문은 난해한 경영학 용어로 가득 차 있지만, 이것을 가볍게 무시하기는 힘들다. 이들이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물론 그 결정은 지적 가치가 아니라 수지타산을 바탕으로 내려진다.) 이런 패턴은 위계질서를 따라 내려가면서 재생산된다. 최고 경영진인 잉글랜드 고등교육재정지원위원회, 우수성보증국, 교육기술부Department for Education and Skill가 목표를 정해서 내려 보내면 관리자인 학과장이 실행에 옮기는 식이다.

이런 과정은 기업 운영하듯 대학을 운영하려는 정부 정책을 반영한다. 램버트 보고서는 대학 경영에 특별한 관심을 뒀다. “많은 대학들이 구조를 개편하고 각종 위원회의 권한을 학사·행정 관리자들에게 넘기고 있다. 그 결과 의사 결정이 신속해지고 경영이 활성화됐다. 다른 대학들도 이런 선례를 따르고 이 분야 최고의 실천에서 배워야 한다.” 램버트는 특히 부총장의 구실을 강조한다.

다른 누구보다 부총장의 비전과 경영 능력이 대학의 미래와 성공을 좌우한다. 이제 부총장의 구실은 매년 수억 파운드를 운용하는 CEO의 구실과 매우 비슷하다. 지속가능한 장기 전략과 재정 계획을 발전시키고 수행하는 과제에는 경영자다운 전략적 리더십이 상당히 필요하다. 대학도 마찬가지다.35

물론 이는 토니 블레어가 거듭거듭 말하고, 더 광범하게는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같은 억만장자를 영웅으로 만드는 데 이용되는 “리더십” 이데올로기다. 그러므로 부총장들의 으스대는 태도(와 어마어마한 봉급)는 일차적으로는 개인의 허영심과 탐욕 탓이 아니다. 그것은 더 광범한 신자유주의 논리를 반영한다. 부총장이 대학을 기업처럼 운영하는 CEO라면, 응당 CEO처럼 대접받아야 하고 급여도 CEO만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학 당국과 부총장들이 2006년 봉급 협상 때 드러난 다음의 사실을 정당화하는 논리다. 대학 총장들의 평균 연봉은 15만8천 파운드로 지난 3년 여 동안 25퍼센트 상승했고, 부총장 33명은 급여가 총리보다 더 많고, 18명은 연봉이 20만 파운드 이상이었다. “부총장들은 수백만 파운드를 운영하는 복잡한 조직의 최고 경영자처럼 힘든 일을 한다”고 대학사용자협회Universities and Colleges Employers Association와 유니버시티스 UK[영국판 대학총장협의회 ─ 옮긴이]는 말한다. “그들의 연봉은 충분한 역량과 경험과 재능을 갖춘 인재들을 성장하는 부문으로 초빙하고 보존하고 보상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을 반영한다.”36 정확하게 똑같은 주장이 기업 임원 연봉의 터무니없는 인상을 정당화하는 데도 이용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최고 CEO들의 급여는 1971년 평균 임금의 47곱절에서 1999년 2,381곱절로 상승했고, 이는 같은 기간의 기업 이윤이나 주가 상승폭을 초과하는 것이다.37

그러나 대학들은 단순히 기업처럼 운영되는 것만은 아니다. 대학은 기업과 더욱 밀접하게 협력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신노동당 정부가 지지하는 램버트 보고서는 이른바 “지식 이전”, 즉 기업에 직접 이익이 되고 기업이 직접 이용하는 대학 연구 활동을 크게 강조한다. 대학과 사기업의 파트너십이 강하게 추진되고 있다. 이는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다. 대학이 기업과 연구 계약을 맺기도 하고, 기업에 자문을 해 주기도 하고, 장기적인 협력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하고, 스스로 “대학 부설 기업”, 즉 대학의 연구 성과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자회사를 세우기도 한다.

이런 활동을 지원하고자 정부는 고등교육혁신기금Higher Education Innovation Fund이 재정을 지원하는 이른바 “제3의 물결 자금” 제도를 도입했다. 잉글랜드 고등교육재정지원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일부 HEIs[고등교육 기관]이 제3의 물결 활동을 강의 다음으로 중요한 과제로 삼아서 생산성을 높이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데서 더 큰 구실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38 반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 말은 일부 대학들이 자체 연구를 하기보다는 기업을 위해 일하거나 기업을 세우라는 압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잉글랜드 고등교육재정지원위원회는 이제 정기적으로 기업 리포트를 작성한다. 최신호는 2006년 7월에 발간됐는데, <파이낸셜 타임스>의 보도를 보면 영국 대학들이 점점 더 기업처럼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3~04년에 옵션 계약과 라이선스(사용권) 계약 체결 건수가 198퍼센트 급증해 2천2백56건이나 됐다. 2003~04년에 사용권 계약, 연구 계약, 컨설팅 수입 등의 활동이 경제에 기여한 바를 모두 합치면 20억 파운드쯤 된다.
대학은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점점 더 많이 특허등록해 왔다. 잉글랜드 고등교육재정지원위원회의 정책 담당자인 애이드리언 데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5년 전만 해도 기술 상업화는 대학 세계에서는 생소한 용어였고 뭘 할지도 모르면서 자회사를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이 많았다. 이제는 비록 몇 안 되지만 우수한 기업들이 생겨났다.”39

일부 대학 기업들은 수익성이 상당히 좋은 기업이 됐다. 임페리얼칼리지가 세운 최초의 대학 소유 기술이전 기업[한국의 기술지주회사와 비슷한 형태 ─ M21]인 임페리얼 이노베이션스는 2006년 7월 주식시장에 상장되면서 금융기관에 지분 14퍼센트를 팔아 2천5백만 파운드를 벌었다.40 “첨단 기술 아이디어를 수익성 있는 기업으로 바꾸는 데” 전문가라는 한 사람은 <파이낸셜 타임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2년 안에 영국 최고의 연구 대학들 대다수가 연구·개발 성과의 독점 이용권을 기업에 제공하는 장기 계약을 체결할 것이다.” 대학 열 곳은 이미 이런 계약을 체결했고, “지적 재산을 상업화하는 기업들은 나머지 우수 대학 30곳과 계약을 먼저 맺으려고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41

프롤레타리아화와 불안정성

신자유주의적 대학 구조조정으로 교원과 학생의 처지가 모두 급격하게 바뀌었다. 이런 변화는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화”와 “불안정성.” 이 단어들은 과장인 듯도 하지만, 사회적·경제적 현실을 말해 준다. 프롤레타리아화는 임금노동자(자기 노동력을 시장에서 팔아야 하고 직장에서는 경영자의 권력에 종속되는)로 전락하는 과정이다. 불안정성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점점 더 많은 노동자와 예비 노동자들이 겪는 불안한 고용 상황을 말한다. 즉, 임시직이나 계약직이나 어쩌면 파트타임 일을 하면서 또는 투잡·쓰리잡을 하면서 늘상 취업과 실업의 언저리를 맴도는 것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교수들은 피고용인 중에서 비교적 특권적인 집단이었다. 교수들은 전문직 지위와 높은 봉급 수준을 누렸다. 교수들은 업무 자율성도 상당했는데, 봉급쟁이치고는 드물게 자기 시간을 관리하며 강의 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다. 교수들이 흔히 대학을 운영하기도 하는 탓에 이런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런 조건들이 대학을 이해관계가 동일한 구성원들의 공동체로 보는 생각의 물질적 근거였다. 그런 조건들은 또, 오래된 대학들에서 대학교원협의회AUT, Association of University Teachers 소속 교수들이 전통적으로 대학교원협의회를 노동조합이 아니라 전문가 단체로 보는 견해로 나타났다.

이런 특권적 지위는 19세기 말부터 대학이 하던 구실을 반영했는데, 당시 대학들은 여전히 극소수의 젊은 남성을 주로 가르치는 현대적 기관으로 발전했다. 옥스브리지는 세계 제국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상층 중간계급 전문가들과 옛 귀족들을 결속시키는 기능을 맡았고, 다른 신설 대학들은 교육 체계 자체의 확장에 필요한 인력뿐 아니라 현대 산업 자본주의 경제에 필요한 연구자와 전문가도 양성했다.

심지어 고등교육을 확장하라고 조언한 1963년 로빈슨 경의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은 이 엘리트적 성격 덕분에, 사회학자 A H 핼지가 썼듯이 “대학은 자율적일 권리, 스스로 운영할 권리, 민주적 의회의 감시를 받지 않는 국가 기구들을 통해 사회적 자금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1919~89년 대학에 정부 재정을 교부하는 책임을 맡았던 대학보조금위원회UGC, University Grants Committee는 “이런 대학의 이해관계[강의와 연구에서]를 반영해 정부의 통제에 맞서 대학을 방어하면서 대학과 국가 사이에서 다리 겸 완충지대 구실을 했다.”42

핼지는 옛 교수들의 세계관(대학교원협의회가 표방하기도 했던)을 약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 “신사는 임금·노동시간·노동조건에 연연하지 않는다. 신사에게는 고용주도 없고, 노동조합도 없고, 협상·중재·조정 기구도 없다. 신사가 받는 것은 사례금이지 임금이 아니다. 신사는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천직을 찾는다.”43

지난 25년 동안의 경험은 이런 전망을 완전히 산산조각냈다. 교수들의 봉급은 실질 기준으로는 대체로 정체했고, 상대적으로는 감소했다. 1928~29년 교수들의 평균 연봉은 제조업 노동자 평균 소득의 3.7곱절이었는데, 1966~67년에는 2.1곱절, 1988~89년에는 1.54곱절로 떨어졌다.44 앞에서 살펴봤듯이, 가르칠 학생도 많아지고 맡아야 할 행정 업무도 대폭 늘어나면서 교수들이 해야 할 일도 급속하게 많아졌다. 이런 업무 대부분은 대학들을 운영하는 정부와 정부 산하 기관들이 매우 집중적으로 강요하는 것들이다. 대학보조금위원회를 대체한 잉글랜드 고등교육재정지원위원회는 대학보조금위원회와 달리 국가 정책 수단일 뿐이다. 잉글랜드 고등교육재정지원위원회의 지침에 따라, 연구실적평가용 논문 발표 압력에 끊임없이 시달리다 보니 연구는 극심한 생존 경쟁이 됐다. 조직 경영 기법이 발달하면서 권력은 교수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부총장을 중심으로 한 훨씬 더 소수의 집단으로 넘어갔다.

물론 부문에 따라 조건은 다양하다. “연구 대학들”(러셀 그룹과 극소수 대학들)의 엘리트들은 사정이 대체로 더 나았고 연구실적평가를 위해 채용된 스타 교수들은 어디에 있든 좋은 대접을 받았다. 게다가 대학에서는 사용자와 평범한 피고용인의 경계선이 여전히 다른 작업장보다 흐릿하다. 학과장은 “동료”이기도 하고 “라인 관리자”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 때문에 상당한 혼란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일부 관리자들은 노동조합원이기도 하다.

한편, 전에 신설 대학의 교수들은 오래된 대학의 교수들보다 특권이 적었다. 예를 들어, 연구 시간을 확보하려고 투쟁하는 것은 신설 대학 교수들에게 결코 낯선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노동조합인 전국고등교육교원협의회Natfhe, National Association of Teacher in Further and Higher Education가 훨씬 더 전투적인 노동조합 운동 성향을 보이고 흔히 더 좌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전국고등교육교원협의회의 마지막 사무총장을 지낸 폴 매크니가 이 노동조합을 이끌 때 전국고등교육교원협의회의 정치적 태도는 특히 강경했는데, 전쟁저지연합StWC,Stop the War Coalition과 반파시즘연합UAF,Unite Against Fascism을 지지한 것이 두드러진다. 전국고등교육교원협의회가 직업교육 칼리지의 교원들도 조직한 덕분에 전투적 전통이 강해질 수 있었다. 칼리지는 1990년대에 훨씬 더 혹독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겪었고, 그 결과 칼리지의 교원과 학생들의 처지는 당시까지는 아직 고통을 겪지 않았던 대학교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악화했다.

이렇듯 상황은 다양하지만 핼지가 “대학 교직의 점진적 프롤레타리아화”라고 부른45 전반적 추세는 매우 분명하다. 대학 교원들은 고급 자격증을 가진 임금노동자 처지로 전락하고 있다. 이런 과정은 인식 변화에도 반영된다. 대학을 공동체로 보는 관점이 여전히 어느 정도는 현실적이었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교수로 임용된 오래된 대학들의 원로 교수들 사이에서 특히 분명하다.46 최근에는 흔히 정부와 대학 경영진을 향한 진정한 분노를 표현하는 “저들과 우리”라는 생각이 훨씬 더 널리 퍼졌다. 이런 심정 변화와 더불어 오래된 대학에서 진정한 노동조합 활동도 나타났다. 최근 대학교원협의회의 쟁의 행의 찬반 투표에서 다수가 찬성한 것이나 대학교원협의회와 전국고등교육교원협의회가 통합해 2006년 6월 1일 대학노조가 출범한 것이 그 예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은 교원들의 조건이 열악해지는 것보다 더 넓고 깊은 과정이다. 대학들은 단기 계약직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연구자나 연구원으로 고용되지만 나머지는 점점 더 가중되는 강의 부담을 지기 위해 고용된다. 미국 상위 대학들에서 나타나는 양상이 영국에서 되풀이되는 경향이 강한데, 미국에서는 유명 교수가 개설한 강좌에서 실제 세미나나 개별 지도는 대학원생 조교나 시간제 교원들이 진행하는 실정이다.

박사과정의 학생에 대한 지원은 실로 얼마 안 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연구비를 마련해야 한다. 한 가지 분명한 방법은 강의를 나가는 것이고, 대체로 자신이 공부하는 대학에서 강의를 맡는다. 때때로 그들은 연구생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강의를 맡기도 하고, 시간제 교원 생활을 할 때도 있고, 풀타임으로 채용되더라도 기간제 “강의 조교” 등의 형태로 고용된다.

대학원생 교원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콜린 브라이슨은 “영국 고등교육에서 강의를 하는 유급 풀타임·파트타임 교원의 수는 7만 명쯤” 되는데, 이 중 대학원생 교원은 1만 5천 명뿐이라고 추정했다.47 시간제 교원과 그 밖의 계약직 교원들은 신자유주의적 대학의 불안정 노동자다. 그 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상당히 늘었는데, 점점 많아지는 학생들을 가르칠 저렴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따져 보면 비용은 높다.

브라이슨이 연구하거나 요약한 결과를 보면, 시간제 교원들은 대체로 강의를 준비하는 시간에 대해서는 수당을 받지 못하고, 연수나 지원도 거의 받지 못하고, 자신이 가르칠 과목 강의를 기획하는 데서도 주변화되고 학과의 다른 문제들을 결정할 때도 그렇다. 따라서 그들이 대학을 위해 헌신하기를 바라기는 힘들다. 연구원들도, 비록 업무 만족도가 더 높긴 하지만, 고용 불안에 시달린다. 점점 더 많은 과학기술 노동자들도 대기업 연구소에서 고액의 보수를 받는 안정된 일자리를 얻기보다는 대학의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일한다.

고등교육에 만연한 여성 차별은, 시급 여성 연구원은 많지만 대학 위계 서열의 상층에는 여성이 드문 현실에 반영된다.48 2004~05년 전체 대학 교원의 40퍼센트가 여성이었지만 정교수와 학과장 중에는 15퍼센트, 부교수와 선임 연구원 중에는 29퍼센트만이 여성이었다. 여성 대학 교원이나 연구원 가운데 정규직은 62.7퍼센트인데, 남성은 76.7퍼센트가 정규직이다.49

20세기를 거치면서 학생들의 사회적 성격도 엄청나게 많이 바뀌었다. 1세기 전에 대학은 거의 귀족과 상층 중간계급 가정 배경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1900년에는 대학생이 2만 5천 명밖에 안 됐고, 1924년에는 6만 1천 명, 1939년에는 6만 9천 명이었다. 옥스퍼드대학교 학부생들이 1926년 5월 총파업 때 파업 파괴 행위를 한 것은 유명하다. 대학은 제2차세계대전 뒤에 두 차례 크게 확장했는데, 한번은 1960년대이고 다른 한번은 지난 20여 년이다. 영국에서 18세 이상 인구 가운데 대학 진학자 비율은 제1차세계대전 전의 3퍼센트 미만에서 1962~63년 7.2퍼센트, 1972~73년 14.2퍼센트, 1988~89년 16.9퍼센트로 증가했다.50

그러나 학생 수는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많은 연구 결과를 보면 육체 노동계급 가정 배경의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기는 여전히 힘들다. 옥스퍼드대학교 너필드 대학은 제2차세계대전 후 영국의 사회적 이동성에 관한 중요한 연구(1913~52년생 남성들을 인터뷰한 것을 바탕으로 했다)를 했는데, 그 결과를 보면 이른바 “서비스 계급”인 전문직·관리직·행정직이 교육 시스템을 모두 장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연구한 지난 40년 동안 교육 기회 불평등은 두드러지게 공고해졌다. 서비스 계급의 중등학교 선택 기회는 (육체) 노동계급보다 거의 세 곱절 높았다. … 노동계급 자녀들의 대학 진학률은 2퍼센트 상승했지만, 서비스 계급 자녀들의 대학 진학률은 19퍼센트 상승했다.51

너필드 사회이동성연구그룹(과 많은 공식 연구들)이 사용한 계급 분류는 여러모로 틀렸는데, 소득과 직업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보면 개인의 계급 지위는 생산관계, 특히 착취(직접생산자에게서 잉여 노동이 추출되는) 과정에서 처한 위치에 달려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동계급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고 착취당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 즉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할 뿐 아니라 자본을 위한 이윤도 생산해야 하는 사람들을 모두 뜻한다. 노동계급을 규정할 때는 직장에서 경영 권력에 종속되는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육체 노동자인지 화이트칼라인지, 얼마나 숙련됐는지 등은 상관이 없다.52

오늘날 많은 노동자들은 대학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자본에게 숙련 노동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숙련 육체 노동자 대중 위에는 비교적 소수의 관리자 계층이 있는데, 이들은 다른 노동인구를 감시하는 대가로 자율성과 물질적 특권을 받으면서 결국은 자본가 계급 자체로 편입된다. 그 아래에는 상대적으로 미숙련이고 보수가 낮은 육체 노동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흔히 고용이 불안정하다. 이 집단의 자녀들이 대학에 들어가기가 가장 힘들다.

2005년 1월 잉글랜드 고등교육재정지원위원회가 발간한 중요한 연구 결과를 보면, 잉글랜드에서는 18~19세 인구의 약 30퍼센트가, 스코틀랜드에서는 약 38퍼센트가 고등교육을 받고 있었다. 최근에 고등교육 참여자가 가장 많이 증가한 때는 신노동당 집권기가 아니라 보수당 정권 시절이었다. 고등교육을 받는 젊은이들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곱절로 늘었으나 1994~2000년에는 고작 2퍼센트 증가했다. 게다가 “HE[고등교육] 기관에 진학하는 기회는 거주 지역에 따라 심각한 차이가 있다. 상위 20퍼센트 지역에 사는 청년들은 하위 20퍼센트 지역에 사는 청년들보다 대체로 대여섯 곱절 많이 고등교육 기관에 진학한다.” 선거구를 기준으로 비교한 연구 결과를 보면,

하위 선거구 네 곳(셰필드, 브라이트사이드, 노팅엄 북부, 리즈 중부, 브리스톨 남부)에 사는 청년들은 10명당 1명꼴로 또는 더 적은 비율로 HE 기관에 진학한다. 반면에, 상위 선거구(켄싱턴과 첼시, 웨스트민스터, 셰필드 할람과 이스트우드(스코틀랜드))에서는 3명당 2명이 HE 기관에 진학한다.53

굳이 사회지리학 전문가가 아니어도 이 두 선거구 그룹이 각각 영국의 가장 부유한 지역과 가장 가난한 지역을 대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역별 인구조사 결과를 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정은 한결같다. 청년들의 [고등교육 – 옮긴이] 참여율이 가장 낮은 지역은 여러 면에서 불리하고, 반대로 참여율이 높은 지역은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
참여율이 낮은 지역의 아이들은 흔히 잉글랜드에서 가장 낙후한 구의 공공 임대주택에 거주하고, 참여율이 높은 지역에 사는 또래보다 예컨대 집도 좁고 가정용품도 적다. 참여율 지도를 보면, 참여율이 낮은 지역의 중등학교에서는 GCSE 시험[9] 다섯 과목에서 A~C 학점을 받는 학생 비중이 낮다. 반대로, 참여율이 높은 지역의 중등학교(수업료를 내는 경우가 흔하다)에서는 거의 모든 학생이 이 시험을 통과한다. 참여율이 낮은 지역의 성인들은 육체노동에 종사하고, 소득이 적고, 자산심사 급여를 받는 경향이 있으며, 예를 들어 자동차나 해외 휴가도 없다. 그들은 참여율이 높은 지역의 성인들보다 고등교육 경험이 훨씬 더 적고, 두 집단은 정치·문화·소비 성향 등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54

잉글랜드 고등교육재정지원위원회 연구 보고서 저자인 마이클 코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국의 모든 지역에서 상위 20퍼센트 지역과 같은 비율로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한다면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 수는 1백만 명 늘어날 것이다.”55 그의 연구는 불평등과 관련해 널리 알려진 사실을 확인해 준다. 유리한 조건과 불리한 조건은 자꾸 누적된다는 점, 즉 빈부 격차는 단지 하나의 요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는 계속 유리하고 누구에게는 계속 불리한 전반적인 패턴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임산부의 신체적·정신적 건강, 영유아기의 영양 상태와 거주 공간과 운동과 개별적 보살핌, [성장기의 - M21] 독서와 여행 기회, 학교와 부모의 양육 수준 등이 포함된다. 이런 패턴의 바탕에는 당연히 부와 소득의 분배가 있다.56

아이의 학업 성취도(당연히 대학 진학을 좌우하는 요인이다)는 여러 면에서 학생이 이런 유리함과 불리함의 전반적 패턴 속의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다. 재무부 연구 결과는 다음을 보여 준다.

● 아버지의 소득이 다른 사람들의 곱절이면 그 아들의 수학 성적은 다른 아이들보다 평균 5점[100점 만점 기준으로 - M21] 더 높고 독해 성적은 2.7점 더 높다.

● 그 딸은 수학과 독해 성적 모두 5점 더 높다.57

신노동당 정부는 대학 진학에 불평등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앞에서 언급된 증거들은 신노동당 정부의 연구에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교육은 대체로 노동시장에 더 효과적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개인 능력을 향상시켜 불평등을 완화하려 한 고든 브라운 전략의 핵심이었다. “기회 균등”은 정부 고등교육 정책의 주요 목표 중 하나인데, 여기에는 18~30세 인구 중 대학 진학자를 현재 43퍼센트에서 2010년 50퍼센트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도 포함돼 있다.

한 연구 보고서의 저자들은 이런 목표가 달성되리라는 “가망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출산율 하락 때문에 2010~11년 뒤에는 대학에 진학할 청년 수가 급감하리라는 것이다. 게다가 출산율은 고등교육 참여가 더 낮은 상대적 빈곤층에서 특히 더 급격하게 하락할 것이고, 그래서 이런 계층이 배경인 청년들의 고등교육 진학은 실제로 하락할 것이다.58

이런 분석이 옳든 그르든 신노동당의 정책은 대학 진학을 늘리겠다는 목표와 반대 효과를 낼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 요인이 있다. 첫째, 블레어와 브라운이 신자유주의에 완전히 헌신한 탓에 심각한 빈부격차가 끊임없이 지속된다는 점이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지적했듯이,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소득을 재분배하려는 브라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면에서 노동당 정부 9년 후의 불평등은 마거릿 대처 정부 말기와 비슷하거나 더 심해졌다고 … IFS[Institute of Fiscal Studies, 재정연구소]의 마이크 브루어는 말한다. 브라운 총리는 ‘성과 없는’ 재분배에 너무 많이 지출했다.”59 이처럼 유리한 조건과 불리한 조건이 누적되는 패턴(대학 진학 기회의 불평등으로 나타나는)은 신노동당 정부에서 훨씬 더 굳어졌다.

둘째, 블레어 정부가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 대학을 확대하는 데 사용한 주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생활보조금을 폐지하고 등록금을 도입하거나 인상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학자금을 마련해야 해, 빚이 쌓여 갔다. 심지어 추가등록금top-up fees(대체로 1년에 최고 3천 파운드까지 대학들이 책정하는)[10]을 내야 하는 2006년 가을 전부터 이미 노동계급의 상대적 빈곤층 가정의 청년들은 대학 진학을 포기할 것이라는 증거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18~19세 대학 입학생 가운데 공립 학교·칼리지 졸업자 비율은 1999년 85퍼센트에서 2003~04년 86.8퍼센트로 증가했지만 2004~05년에는 86.7퍼센트로 감소했다. 대학 입학생 가운데 상대적 빈곤층 가정 배경 학생은 2003~04년 28.6퍼센트에서 2004~05년 28.2퍼센트로 떨어졌다.60 통계적으로 이런 변화는 큰 차이는 아니지만, 학생들의 부채와 등록금이 부정적 효과를 낸다는 다른 증거들이 있다.

2005년 12월 영국 대학 지원자는 1년 전보다 5퍼센트 줄었다.61 A 레벨 시험에서[11] B학점 이상을 받으리라고 예상되는 공립학교 12학년 학생 7천 명 가운데 27퍼센트는 대학 진학 가능성이 낮았는데, 이유는 높은 등록금 때문이었다.62 반면에, 상위 세 직업군 가정 배경 학생들은 러셀 그룹 대학들에 다니는 학생의 73퍼센트를 차지했다.63

대학 진학 기회가 불평등하지만, 학생 수는 훨씬 더 많아지고 더 다양해졌다. 매년 1백만 명이 신설 대학에 입학하고, 4명 중 1명 이상이 상대적 빈곤층 가정 학생이다. 이는 대학생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상당히 달라졌음을 뜻한다. 그 중 하나는 대학생들이 소비자이자 대부분 예비 노동자로서 경제적으로 더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제조업은 쇠퇴하고 학생 수는 늘어난 덕분에 많은 영국 도시에서 대학이 훨씬 더 중요한 경제적 요소가 됐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부총리실이 발표한 연구 결과를 보도했는데 그것을 보면,

주요 대도시들에서 인구 감소 추세가 역전되고 런던의 성공과 비슷한 사례들이 나타났는데, 이런 성공은 주로 대학 교육 덕분에 노동인구의 수준이 향상되고 주민들의 구성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맨체스터는 도시 소재 대학 네 곳으로 몰려든 학생들이 졸업 후에도 계속 남아 거주한 덕분에 도시의 운명이 바뀌었다.
이 학생들 덕분에 주택 시장이 부활하고 지역의 지식 기반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다.64

매우 밀집된 학생들의 소비가 미치는 경제적 영향은 맨체스터의 옥스퍼드 대로나 브리스톨의 클리프턴 같은 곳에서 매우 두드러진다. 그러나 부유한 집 학생들이 흥청망청 술 마시는 장면을 떠올리면 안 된다. 등록금과 대출을 바탕으로 한 학생 융자 제도 때문에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 뚜렷하니 말이다. <가디언>은 사우스뱅크대학교와 정책연구소가 2003년 11월 발행한 정부 위탁 연구 보고서를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가난한 학생들은 평균 1만 파운드 이상 빚을 지고 대학을 졸업한다. 유급 노동도 하고 부유한 학생들보다 적게 지출하는데도 그렇다. 전체 학생 부채는 1998~99년에서 2002~03년 사이에 곱절 이상 증가해, 졸업반 학생들의 빚이 3천4백56파운드에서 평균 8천6백66파운드로 증가했다. 2003년 학부생의 절반 이상은 9천6백73파운드나 그 이상 빚을 남기고 졸업할 것이라고 예측됐다. 맨디 텔퍼드 전국대학생연합NUS 의장은 정부가 “수치들을 교묘하게 왜곡해서 학생들이 뭔가 사치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처럼 보이게 만들려 한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학생의 43퍼센트가 빈곤층 수준의 소득을 번다. 이는 빈곤층 가구가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의 곱절에 해당한다.”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저소득층 가정 배경의 학생들은 빚을 지기 십상이고, 졸업할 때쯤에는 막대한 부채를 떠안을 것으로 예상했다.” 부유한 가정 배경의 학생들은 저축과 가족의 “든든한 재정 지원” 덕택에 큰 빚을 지지 않아도 된다.65

레버훔 트러스트[영국의 연구·교육·자선 단체 — M21]가 재정을 지원한 다른 연구 보고서는 추가등록금이 학생 부채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예측한다. <가디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 연구는 … 또한 장애인 학생들, 그리고 집에서 도움을 얻지 못하는 학생들이 가장 혹독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 이 연구는 등록금이 고스란히 부채로 이전된다고 밝혔다. 등록금 인상과 함께 평균 부채도 증가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추가등록금이 도입됐다고 해서 학기 중 일자리가 전반적으로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부모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은 늘어났고, 이 때문에 이런 학생들의 처지는 훨씬 더 불리해졌다.
그와 동시에, 이 연구는 추가등록금 도입으로 일부 학생들의 처지가 균등해졌다고 말한다. 부모가 대학교를 나온 학생들은 전에는 학기 중에 일을 하는 경우가 훨씬 적었지만, 추가등록금이 도입된 뒤로는 다른 학생들처럼 학기 중에 일을 하게 됐다.66

최근에 영국노총TUC과 전국대학생연합이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를 보면 1996~2006년에 일하면서 학비를 스스로 버는 학생 수는 40만 8천8백80명에서 68만 7백18명으로 54퍼센트 증가했다. 이런 학생들 10명 가운데 한 명은 풀타임으로 일했다. 이 연구 결과를 보면,

학생 고용은 소매업과 접객업, 즉 임금이 가장 낮은 두 부문에 집중돼 있다. …
● 풀타임으로 일하는 학생 중 소매업 부문에 고용된 비율은 40퍼센트로, 거의 50만 명에 육박한다.
● 풀타임으로 일하는 학생 중 약 25만 명은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일하는데, 이는 학생 고용 인구의 21퍼센트에 달한다.
● 파트타임 남성의 평균 시급은 소매업에서는 6.21파운드이고 호텔과 레스토랑에서는 5.70파운드다. 파트타임 여성의 평균 시급은 각각 5.98파운드와 5.51파운드다.
● 접객업에서 학생 고용은 1996~2006년에 3분의 1 이상 증가했고 남녀 성별 분리가 뚜렷하다. 1996년 이래로 이 부문에서 일하는 남학생 수는 22.9퍼센트 증가한 반면, 여학생 수는 45.8퍼센트 증가해 남학생 증가율의 곱절에 달했다.67

일부 학생들은 더 모멸적이고 위험한 일을 하기도 하는데, 학자금을 마련하고자 랩댄스를 추는 여학생들의 사연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대체로 더 많은 학생들은 파트타임, 저임금, 임시직으로 일하는 불안정 노동인구로 편입된다. 그런 노동인구(그들 중 다수는 이민 노동자다)는 지식경제 이데올로그들이 강조하는 고임금·고숙련 직업만큼이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기능하는 데서 핵심적이다.

1960년대의 대학 확대 이래로 학생들은 과도적 집단, 즉 자신의 배경인 계급과 자신의 미래 소속 계급 사이에 끼인 집단이었다. 종착지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학생들은 정치적으로 휘발성이 강했다.68 이런 구조적 불안정성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대학 진학이 경제적으로 유리할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학 졸업자와 “학사학위에 준하는” 자격증 보유자는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들보다 평균 50퍼센트 더 많이 번다.69

그러나 “졸업 프리미엄”은 특히 특권적 지위와 관련해서 보면 대다수 졸업생들이 누리는 것이 아니다. 극히 일부만이 진정으로 소득이 좋은 일자리, 예를 들어 런던 금융가의 고소득 직종에 갈 수 있다. 대다수는 비교적 보수가 좋은 숙련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된다. 공공부문에 고용되든 사기업에 고용되든 그들은 더 높은 생산성과 경쟁력을 위해 대학에서 받은 압력을 똑같이 받게 될 것이다. 교수들(오늘날 교수들은 대체로 석사 학위 이상의 학위를 한두 개씩 갖고 있다)이 처한 곤경을 보면 대학교 졸업장이 더는 엘리트로 가는 보증수표가 아님을 매우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전반적 패턴이 한 세대 전의 패턴에서 급격하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1960년대부터 대학은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되는 준비 기관이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대학 확대의 결과 중 하나는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임시직으로 노동을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학생 때 불안정성을 경험하면서, 졸업 후에 그들 앞에 펼쳐질 신자유주의 직업 세계를 잘 준비하는 셈이다.

저항은 소용없는 짓이 아니다

지난 25년 동안 추진된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가차없기는 했지만, 일거에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변화는 소나기처럼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떨어졌다. 각각의 국면에서 많은 교수들은 달갑지 않은 변화에 반대하지는 않으면서 그 폐해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하는 식으로 대처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누적돼 결과적으로 그들이 고등교육을 급격하게, 대체로 더 나쁜 쪽으로 변모시킨 신자유주의적 전환 과정에 협력한 꼴이 됐다.

많은 교수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혐오하는 변화를 시행하는 데 일조하면서 심각하게 사기저하했다. 교수들이 여기에 동참한 밑바탕에는 대처의 유명한 말 “대안은 없다”는 가정이 깔려 있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개혁”에 저항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이런 가정을 받아들이면, 최악으로는 저쪽 편으로 전향해서 지금 대학을 운영하는 유력자 무리에 끼거나, 기껏해야 승진이나 조기 퇴직 같은 개인적 해결책을 추구하게 됐다.

그러나 대안은 있고, 저항은 쓸데없는 짓이 아니다.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저항 운동이 떠오르면서 분명해졌다. 1994년 1월 멕시코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 봉기 - M21], 훨씬 더 큰 규모였던 1999년 11월 시애틀 시위와 2001년 이탈리아 제노바 시위가 그 예다. 이런 운동들이 가장 광범하게 모인 세계사회포럼은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라는 구호를 유행시켰다. 이 구호의 뜻인즉, 우리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2002년 11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제1차 유럽사회포럼은 당시 임박했던 [미국의 - M21] 이라크 공격에 반대해 이듬해인 2003년 2월 15일 국제행동의날을 호소하면서 운동의 시야를 제국주의와 전쟁으로 확대했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대안은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투쟁이 발전한 덕분에 더 가시화됐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빈민들의 지지를 업고 석유 수익을 진정한 사회 개혁과 미국의 패권에 대항하는 데 사용했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던 전임 대통령들을 날려버린 2003년 10월과 2005년 5~6월 두 차례 빈민 항쟁 덕분에 대통령에 당선해서, 외국의 다국적기업에 매각됐던 석유 기업과 가스 기업을 재국유화했다.

유럽으로 눈을 돌리면 2006년 3~4월 프랑스에서 벌어진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멋진 항의 운동이 있었는데, 학생들은 노동조합의 지지를 얻으며 최초고용계약법CPE 제정을 좌절시켰다. 최초고용계약법은 사용자가 고용 계약 2년 미만의 26세 이하 노동자를 사전 통지 없이 해고할 수 있도록 허용한 법이었다. 청년 노동자들의 처지를 훨씬 더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우파 정부의 조처에 맞선 이 항쟁의 특징은 학생과 노동자의 관계가 1968년 5~6월 학생·노동자 대항쟁 때보다 훨씬 더 밀접해진 것이었다. 스타시스 쿠벨라키스[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 교수 — 옮긴이]는 “이번에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청년들은 노동계의 일부로서 행동했다”고 말했다.70

이런 변화는 전통적인 기능 구분, 즉 고등학교와 대학은 교육으로 노동인구를 재생산하고 작업장은 상품을 생산한다는 구분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쿠벨라키스는 주장했다.

이런 구분은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내재한 이중적 경향의 효과 때문에 사실상 흐려지고 있다. 하나는 고등학교와 대학이 점점 더 자본주의 상품 논리에 종속되는 경향이다. 이런 상품 논리는 덩치는 크고 “경쟁력”은 없는 학교들을 훈련소처럼 만드는데, 이 훈련소는 노동시장을 위한 공급자의 지위(그다지 부럽지 않은)와 똑같은 논리에 점점 더 지배당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고등학생과 특히 대학생의 돈벌이 활동이 증가해 학생과 젊은 노동자의 차이가 줄어드는 경향이다.
이런 활동의 특정 분야나 부문(패스트푸드, 콜센터, 백화점, 슈퍼마켓 체인점)은 전문화하기도 한다. 여기에 유별나게 많은 단기 계약직, 사기성 인턴 기간, 프랑스에서 특히 18~16세 청년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실업 기간 등을 더하면 이런 노동인구의 재프롤레타리아화라는 거센 움직임을 상징하는 다양한 직종을 알 수 있다.
이런 변화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진학하는 부유한 가정 배경의 소수 청년과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다수 사이의 차이는 먼 과거의 일이 되고 있다.
이런 “거대한 전환” 덕분에 (1968 항쟁 때와 비교하면) 학생과 노동자의 연계가 더 쉬워졌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이 연계가 “유기적” 성격, 즉 서로 다른 운동들 사이의 동맹이나 연대가 아니라 공동 투쟁 건설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학생 운동 자체의 주된 양상이 노동계급 투쟁과 가까워진다는 점도 설명된다. 즉, 노동 현장이자 도구(그리고 노동을 준비하는 과정)로 여겨지는 학교를 “봉쇄”(“점거”가 아니다. 둘은 흔히 비슷한 측면이 있는데도 의미를 구분하는 것은 흥미롭다)해서 생산 과정(강의, 시험)을 중단시키려 한다는 것이다.71

학생운동의 급진적 자극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운신의 폭을 제한하고 그들이 정부와 CPE 회생 협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이 영국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앞에서 살펴봤듯이, 학생들이 불안정 노동에 참가한다고 쿠벨라키스가 묘사한 경향은 영국에서도 광범한 수준에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 사례는 영국의 학생과 교원 들에게도 중요하다. 프랑스의 투쟁이 유럽의 다른 곳, 즉 그리스에서도 2006년 5~6월에 학생들이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으며 점거 투쟁을 벌이도록 고무해서 우파 정부의 대학 사유화 계획을 연기시켰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교수들 사이에서 더 전투적인 노동조합 운동이 발전해서, 대학교원협의회와 전국고등교육교원협의회가 통합해 대학노조가 출범했다. 첫 번째 시험대는 2006년 봄에 찾아왔다. 당시 통합을 앞둔 두 노조는 추가등록금에서 생긴 돈으로 비교적 낮은 교수 봉급을 벌충해 주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라고 대학 당국과 정부에 요구하며 함께 시험 거부 투쟁에 돌입했다.

대학 당국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시험 거부는 교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많은 대학들이 쟁의 행위에 참가하면 봉급을 삭감하겠다고 협박했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었다. 교수는 서비스 노동자(그 노동의 혜택이 서비스 수용자에게 직접 전달된다)이므로 쟁의 행위는 언제나 어렵다. 가장 효과적인 쟁의 행위는 강의와 채점을 방해하는 것인데, 이는 학생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학위를 받지 못하게 해서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이 말은 교원들이 쟁의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교원들은 재빨리 전면 파업이나 시험 거부에 나서서 사용자들을 최대한 압박해 적절한 합의에 이르도록 강제하고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험 거부를 둘러싼 학생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전국대학생연합 지도부는 지지했지만, 시험 거부 반대 운동을 벌인 일부 학생단체들의 압력을 받았다. 이는 두 가지 문제를 반영한다. 하나는 전국대학생연합 지도부가 학생들의 이익(예컨대 추가등록금 반대)을 옹호하는 대중 운동을 효과적으로 이끌지 못했다는 점이다. 집단 행동이 효과적이라는 점이 분명하지 않으면, 일부 학생들이 자신을 개별 소비자로 여기면서 교수 노조에 반대해 자구책을 찾게 되는 일이 불가피해진다.

둘째로, 쿠벨라키스가 강조한 사회적 전환의 다른 쪽 측면이 있다. 학생은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이다. 대다수는 어느 정도 숙련된 화이트칼라 직업을 갖게 되지만, 일부는 찬란한 미래를 보장받는 특권층 배경을 갖고 있다. 나머지 상대적 빈곤층 가정 배경 학생들도 여전히 소수 엘리트들이 차지하게 될 보수가 매우 좋은 직업, 특히 런던 금융가의 직업을 갈망한다. 계급 구조의 상층으로 올라가거나 상층에 머물기를 바라는 학생들은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집단 행동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오히려 불평등에서 이득을 얻으려 한다.)

2006년의 시험 거부 투쟁은 결국 누가 먼저 눈을 깜박할 것이냐, 노조냐 아니면 사용자냐 하는 치킨 게임이 돼 버렸다. 불행하게도 눈을 먼저 감은 쪽은 통합을 앞둔 두 노조의 지도부였다. 지도부는 찬반 투표 전까지는 쟁의 행위를 취소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파기하고 며칠 전에 거부한 것과 별 다를 바 없는 협상안을 받아들이며 시험 거부를 중단했다.

노조 고위 상근간부들은 시험 거부가 무너지기 시작했고(그들은 시험 거부를 실질적으로 지원하지도 않았다), 투쟁을 지속하면 많은 대학의 경영진이 중앙 임금 교섭에서 철수할지도 모른다는 논리로 이 투항을 정당화했다. 지역별 교섭이 실질적 위협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노조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지, 유약함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시험 거부의 위력은 많은 교수들이 자신의 노조를 얼마나 지지하는지를 잘 보여 줬다.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진 곳은 아마 일부 오래된 대학들이었을 텐데, 이런 대학에서는 젊은 계약직 강사들이 대학교원협의회 지역 조직들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으며 진정한 노동조합 지부답게 바꾸어 놓았다. 이처럼 시험 거부 투쟁은 대학노조의 잠재력을 힐끗 보여 주는 동시에 지도부가 책임 있게 행동하도록 강제하려면 좌파가 통합 노조 안에서 효과적으로 조직돼야 한다는 것도 보여 줬다.

전국고등교육교원협의회와 대학교원협의회의 대체로 진보적인 정책과, 그 간부들이 시험 거부 투쟁에서 보인 행동 사이의 간극은 대학 강사 노조만의 새롭거나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노동조합 고위 상근간부들은 흔히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중재자 구실을 하는 독특한 사회 집단을 이룬다. 그들은 착취를 끝장내려고 투쟁을 이끌기보다는 노동자가 착취당하는 조건을 개선하고자 협상한다. 비록 최상의 지도부를 선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 조합원들이 지도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조직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새로운 대학노조의 좌파 활동가 조직인 ‘UCU 레프트’는 2006년 6월 첫 총회를 열었다. 그들은 필요하다면 고위 상근간부들과는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강력한 현장 조직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넓은 정치적 시야도 필요할 것이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대학에서(다른 직장에서도) 많은 노동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것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맞설 대안이 없다는 생각이다. 대안세계화 운동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과는 이런 생각에 도전해서, 시장이 으뜸인 세계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보여 준 것이다. 대학에서 좌파가 가장 효과적으로 활동하려면 신자유주의와 전쟁에 저항하는 전 세계적 운동의 일부가 돼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많은 생각과 노력이 필요하다. 유럽사회포럼은 유럽 전역의 교육 운동가들이 만나서 생각을 교환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런 활동은 교수들보다는 중고등학교 교사들과 교사노조에서 훨씬 더 발전한 듯하다. 그러나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면, 다른 대학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대학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해서 온갖 잡다한 사회적 기능을 한다.

● 개인의 자기 계발

● 복잡하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기술 습득

● “순수한” 연구, 즉 지식 자체를 위한 연구 활동

● 상업적·군사적 연구 활동

● 응집력 있는 지배계급 재생산을 지원하기

● 심지어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까지

최근의 대학 구조조정은 대학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필요에 매우 직접적으로 종속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평생·고등교육부 장관인 빌 래멀이 2005년 입학 시즌에 철학, 역사, 고대 그리스·라틴학, 미술 같은 학과의 지원율 하락이 “나쁠 것 없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도 당연하다. 그는 “학생들은 취업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과목을 고르고 있다”고 설명했다.72

그러나 앞에서 밝힌 기능을 모두 똑같은 기관이 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역사적으로도 그렇지 않았다. 과거 두 세기 동안 매우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예컨대 다윈·마르크스·프로이트)은 대학 외부에서 연구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에서 학자의 길을 마감했지만, 그 전에 제네바 특허청 직원일 때 물리학의 혁신을 일으킨 논문을 썼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야 대학은 비판적 사회이론이 발전하는 주요한 장소가 됐고, 많은 사람들은 이 결과로 학자들을 독자층으로 겨냥한 난해한 이론적 담론들이 생겨났다고 생각한다.73

우리는 기존 대학에서 가치 있는 부분을 파괴하는 신자유주의적 대학 개편을 물론 저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수준 낮은 기업 언론의 영향력이 막강한 이때, 대학이 비판적 사고가 생겨날 수 있는 지적 공간을 계속 마련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민주적인 사회에서 대학이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자기 계발, 새로운 기술 습득, 연구 활동 같은 가치 있는 일들을 모두 똑같은 기관이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 인생의 특정 시기에, 대체로는 성인이 되고 난 직후에만 교육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평생 교육” 운운하는 관료들의 말에 담긴 일말의 진실이다.

그리고 대학이 경영진과 원로 교수들이 꼭대기에 있는 오늘날의 대학처럼 위계적으로 운영될 필요는 전혀 없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학생운동이 제기한 대학 민주화 요구, 즉 학생과 모든 대학 노동자가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대학을 개방하고 민주화하려면, 정부가 대기업의 후원을 받아 고등교육을 경쟁과 이윤에 종속시키려는 것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경쟁과 이윤이라는 우선순위를 추구하다가는, 예컨대 누진세로 모은 물자를 부자에게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대폭 이전하는 일 등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 기회의 진정한 균등화를 최대한 빨리 실현하려면 바로 그런 일을 해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 논리를 따로 떼어내서 강화한 것이다. 지금까지 대학의 사례를 통해 살펴봤듯이, 이것은 경쟁과 이윤의 논리다. 이런 논리에 도전한다는 것은 다른 종류의 세계, 예컨대 사회정의, 지속가능한 환경, 진정한 민주주의 같은 우선순위에 따라 운영되는 세계를 추구한다는 뜻이다.74 기존 대학에서 가치 있는 부분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에 도전하는 더 광범한 투쟁과 분리되지 않는다.

MARX21

[1] 이 글에서는 교수와 강사 등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통틀어 교원이라고 칭했다 - M21[↑본문]
[2] 영국에서는 부총장이 실질적으로 대학 행정을 책임지고 총장은 대학 운영에 참여하지 않는 명예직일 뿐이다 — 옮긴이[↑본문]
[3] 고든 브라운은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영국 재무부 장관을 지냈고, 그 뒤 2007년 6월부터 3년간 총리를 지낸 영국 노동당 정치인이다 ─ M21[↑본문]
[4] 지표에서 바로 광물을 캐내는 광산 ─ M21[↑본문]
[5] 폴리테크닉은 과학·기술 전문학교이고, 칼리지는 16세까지 의무교육을 마친 후 대학 입시 준비나 전문적 훈련을 받기 위해 진학하는 2년제 교육기관이다 — M21[↑본문]
[6] 한국에서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의 영문 머리 글자를 따 SKY라고 부르듯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합쳐 부르는 말 — 옮긴이[↑본문]
[7] 모듈은 영국 대학에서 교육 과정의 일부가 되는 단위이다. 모듈화는 모든 학습 내용을 단위화하여, 학생들이 필요에 따라 단위모듈을 조합해 학습 과정을 짜도록 하는 것이다. 단위모듈을 구성하는 요소는 강의, 세미나 등 매우 다양하다 ─ M21[↑본문]
[8] 1년을 3분기로 나눠 중간 분기는 방학이고 나머지 두 분기는 수강 학기인 학제 — M21[↑본문]
[9] 중등 교육 자격 검정 시험. 의무교육인 11학년까지의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는 시험으로 5과목에서 C학점 이상을 취득해야 통과한다 — 옮긴이[↑본문]
[10] 추가등록금top-up fees은 2006년 가을 학기부터 대학생들에게 적용된 등록금제로, 대학 당국이 최고 1천2백50파운드였던 기존 등록금에 더해 수강료를 1년에 최고 3천2백25파운드까지 추가로 걷을 수 있는 제도다 — M21[↑본문]
[11] 대학에 진학하려면 쳐야 하는 일종의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이다. 한 과목당 A학점은 10점, B학점은 8점, C학점은 6점 식으로 점수를 얻으며, 보통은 세 과목 18점 이상 취득을 기본 요건으로 한다 — 옮긴이[↑본문]
1 www.hesa.ac.kr/holidocs/pubinfo/student/institution0405.html [↑본문]
2 HEFCE, Young Participation in Higher Education, January 2005, www.gefce.ac.uk [↑본문]
3 P Hitchens, “Why Does Everyone Find it So Hard to Understand the Tories?”, 17 May 2006, www.hitchensblog.mailonsunday.co.uk [↑본문]
4 Department for Education and Skills, The Future of Higher Education, Cm 5735, January 2003, www.dfes.gov.uk, para 6.1, p68. [↑본문]
5 D Harvey, A Short History of Neoliberalism(Oxford, 2005), p15.[국역: 《신자유주의》, 한울, 2009] [↑본문]
6 G Duménil and D Lévy, “Neoliberal Income Trends”, New Left Review, II/30(2004), pp111, 119. [↑본문]
7 M Brewer et al, Poverty and Inequality in Britain: 2006, Institute of Fiscal Studies, March 2006, www.ifs.org.uk, p24. [↑본문]
8 C Leadbeater, Living on Thin Air(Lodon, 2000), p8. [↑본문]
9 T L Friedman, The World is Flat(London, 2005), p10.[국역: 《세계는 평평하다》, 창해, 2006] [↑본문]
10 특히 A Callinicos, Against the Third Way(Cambridge, 2001), ch1과 An Anti-Capitalist Manifesto(Cambridge, 2003)을 보시오. [↑본문]
11 B Benoit and R Milne, “Germany’s Exporters are Beating the World”, Financial Times, 27 April 2006. [↑본문]
12 J Johnson, “Asia Faces Jobs Crisis that Could Hit Growth”, Financial Times, 27 April 2006. [↑본문]
13 R Brenner, “Towards the Precipice”, London Review of Books, 6 February 2003. Brenner의 The Boom and the Bubble(London, 2002)도 보시오. [↑본문]
14 H M Treasury, Science and Innovation Investment Framework 2004-2014, July 2004, www.hm-treasury.gov.uk, para 1.1, p5. [↑본문]
15 같은 책, para1.19, pp10-11. [↑본문]
16 The Future of Higher Education, p2. [↑본문]
17 Lambert Review of Business-University Collaboration: Final Report, December 2003, www.lambertreview.org.uk, para2.4, p15, para 2.6, p17. [↑본문]
18 같은 책, para 2.10, p18. [↑본문]
19 같은 책, para 1.17, p11. [↑본문]
20 같은 책, para 1.19, p11. [↑본문]
21 같은 책, para 1.3, p9. [↑본문]
22 Science and Innovation Investment Framework 2004-2014, Appendix B, “Setting Targets and Measuring Progress”. [↑본문]
23 Science and Innovation Investment Framework 2004-2014, paras 1.4, 1.6, p7. [↑본문]
24 C Leadbeater, Living in Thin Air, p114. [↑본문]
25 예컨대, A Cockburn and R Blackburn (eds), Student Power(Harmondswoth, 1969). [↑본문]
26 AUT, “The Pay Campaign in Brief”, www.aut.org.uk/paybacktime [↑본문]
27 AUT, “The Academic Pay Shortfall 1981-2003”, www.aut.org.uk [↑본문]
28 H M Treasury, Science and Innovation Investment Framework 2004-2014: Next Steps, March 2006, www.hm-treasuty.gov.uk, ch4. [↑본문]
29 HEFCE, RAE 2008: Guidance on Submissions, June 2005, www.rae,ac.uk, Appendix A, p31. [↑본문]
30 Lambert Review, Table 6.1, p82. [↑본문]
31 House of Commons Education and Skills Committee, The Future of Higher Education: Fifth Report of Session 2002-3, 1, HC 425-1, 10 July 2003, www.dfes.gov.uk, paras 8 and 9, p8. [↑본문]
32 The Future of Higher Education, para 1.14, pp13-14. [↑본문]
33 D McLoed, “Overseas Student Numbers Rise”, Guardian, 13 March 2006. [↑본문]
34 D MacLoed, “International Rescue”, Guardian, 18 April 2006. [↑본문]
35 Lambert Review, para 7.10, p95, para 7.23, p99. [↑본문]
36 M Taylor, “AUT Calls for Inquiry into Vice-Chancellors’ Pay”, Guardian, 9 March 2006. [↑본문]
37 G Duménil and D Lévy, “Neoliberal Trends”, pp116-118. [↑본문]
38 “Third Stream as Second Mission”, 18 May 2006, www.hefce.ac.uk [↑본문]
39 J Boone, “Academics Learn to License Inventions”, Financial Times, 26 July 2006. [↑본문]
40 J Boone, “University Company Sells Stake for ₤25 Million”, Financial Times, 21 July 2006. [↑본문]
41 J Boone, “Most Colleges ‘Set to Sign Technology Transfer Deals’”, Financial Times, 1 August 2006. [↑본문]
42 A H Halsey, Decline of Donnish Domination(Oxford, 1992), pp6, 176. [↑본문]
43 같은 책, p129. [↑본문]
44 같은 책, p131. [↑본문]
45 같은 책, p136. [↑본문]
46 C Bryson, “What about the Workers? The Expansion of Higher Education and the Transformation of Academic Work”, Industrial Relations Journal, 35(2004)를 보시오. [↑본문]
47 C Bryson, Hiring Lectures by the Hour, Natfhe, April 2005, ww.natfhe.org.uk [↑본문]
48 C Bryson, “The Consequences for Women in the Academic Profession of the Widespread Use of Fixed Term Contracts”, Gender, Work and Organisation, 11(2004). [↑본문]
49 C Johnston, “Figures Show Rise in Part-Time Academic Staff”, Guardian, 20 February 2006. [↑본문]
50 A H Halsey, Decline of Donnish Domination, p95. [↑본문]
51 A H Halsey et al, Origins and Destinations(Oxford, 1980), pp205-206. [↑본문]
52 A Callinicos and C Harman, The Changing Working Class(London, 1987)[국역: 《노동자 계급에게 안녕을 말할 때인가》, 책갈피, 2001]를 보시오. [↑본문]
53 Young Participation in Higher Education, pp9, 10-11, 41. [↑본문]
54 같은 책, pp137-138. [↑본문]
55 D MacLeod, “Equality ‘Would Double University Admissions’”, Guardian, 19 January 2005. [↑본문]
56 B Barry, Why Social Justice Matters(Cambridge, 2005). [↑본문]
57 H M Treasury, Tackling Poverty and Extending Opportunity, March 1999, www.hm-treasury.gov.uk, para 3.15, p32. [↑본문]
58 Higher Education Policy Institute, “Demand for Higher Education till 2020”, 21 March 2006, www.hepi.ac.uk [↑본문]
59 C Giles and J Wilson, “State Largesse Brings Hope but Little Change”, Financial Times, 19 September 2006. [↑본문]
60 A Smith, “Government Failing to Widen University Access, Figures Show”, Guardian, 20 July 2006. [↑본문]
61 D MacLeod, “Fees Concern over Fall in University Applications”, Guardian, 15 December 2005. [↑본문]
62 M Taylor, “Fees Deter State School Pupils from University”, Guardian, 22 June 2006. [↑본문]
63 R Garner and B Russell, “Private School Stranglehold on Top Jobs”, Independent, 15 June 2006. [↑본문]
64 M Green, “Universities and Local Power Vital to Recovery of Leading Cities, Says Study”, Financial Times, 8 March 2006. [↑본문]
65 L Ward, “Poor Students Shoulder Debt for Learning”, Guardian, 19 November 2003. [↑본문]
66 “Fees to Triple Student Debt, Says Report”, Guardian, 28 January 2005. [↑본문]
67 TUC/NUS, All Work and No Pay, 2006, www.tuc.org.uk, pp6, 4. [↑본문]
68 C Harman et al, Education, Capitalism, and the Student Revolt(London, 1969), G Stedman Jones, “The Meaning of the Student Revolt”, in A Cockburn and T Blackburn (eds), Student Power, and A Callinicos and S Turner, “The Student Movement Today”, International Socialism, I.75(1975). [↑본문]
69 The Future of Higher Education, para 5.5, p59. [↑본문]
70 S Kouvelakis, “France: From Revolt to Alternative”, International Socialist Tendency Discussion Bulletin, no 8, July 2006, www.istendency.net, p5. [↑본문]
71 같은 글, p6. [↑본문]
72 “Trend to Drop Philosophy No Bad Things, Says Rammell”, Guardian, 15 February 2006. [↑본문]
73 이런 변화에 관한 분석은 R Jacoby, The Last Intellectuals(New York, 1987)을 보시오. [↑본문]
74 A Callinocos, “Alternatives to Neoliberalism”, Socialist Review, July 2006을 보시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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